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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승 Jun 05. 2024

심장이 뛸 때마다 보고 싶어

17화

수연은 차에 시동을 켰다. 태호의 쌍둥이 형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집 앞 카페에서 오 분 거리. 엎어지면 코 닿는데 한 번도 보지 못했다니. 등잔밑이 어두운 법인가.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졌다. 노란불이 깜박깜박 신호 대기에 걸렸다. 그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3년 전 남편 태호는 미국 본사 발령을 이유로 갑자기 이별을 고했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무리 잡아도 소용없었다. 왜 나를 데려가지 않냐고 울부짖어도 돌아오는 건 무응답뿐이었다.


선미가 보여준 보험 증서에 그는 3년 전 크리스마스 다음날 존스홉킨스 병원에서 고환암 수술을 받았다.


암이었다고? 그래서 날 떠난 거라고? 그가 얼마나 외로웠을까 혼자 병마랑 싸우느라고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십 년을 사랑했던, 아니 사랑했다고 믿었던 남자였다. 그런데 왜 연민이 들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옆집 할머니가 암 걸리셔도 죽이라도 쑤어 갖다 주는 게 자신이었다. 그런데 남편이었던 사람에게는 감정이 들지 않았다. 왜일까?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해서? 잠수 이별에 상처를 받아서? 삼 년 만에 사랑이 식어서? 아니면 충격받아서? 마음의 코마 상태 일 수도 있다. 다른 질문이 떠올라 마지막 생각으로 서둘러 결론을 내렸다. 


병은 왜 숨겼을까? 좋게 생각해 나한테 부담주기 싫어서라고 하자. 그런데 암 수술 후 행방이 묘연하다가, 한 달 전 나타난 건 뭘까? 그리고 그 사람이 태호가 아니고 그의 쌍둥이 형이라고?  그럼 그는 지금 어디 있을까? 쌍둥이 형은 왜 태호 행세를 했을까? 죽었나? 죽어서 형이 대신 태호인척? 설마. 말도 안 돼. 이렇게 가버리는 게 어딨어.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차 와이퍼를 켰다. 아 하늘에서 비가 오는 게 아니지. 블라우스 소매로 얼굴을 문질렀다. 소매에 누렇게 파운데이션이 얼룩 졌다. 수연은 이 모든 감정을 지탱하기가 너무 버거웠다. 지금 다 짊어질 필요 없다. 사실이 확인되면 그때 하자. 미리 걱정할 필요 없어. 태호의 행방을 찾아야 해. 형에게 가자.  


곧 수연은 지하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숨을 돌렸다. 형을 만나 사실을 확인한다고 생각하니, 가뿐 숨이 규칙적으로 바뀌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 형에게 전화를 했다. 핸드폰 화면에는 태호 새 폰이라고 뜨고 있었다.  뚜뚜뚜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통화 종료버튼을 누르고 얼른 톡을 남겼다.


“쌍둥이 형인 거 알고 있어요. 지금 만나요.”


톡에 1이 없어진 지 한 시간째. 수연의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두 시간 만에 지이이잉~하며 톡이 울렸다. 반가움과 두려움이 엎치락 뒤치락했다. 쉽사리 확인버튼을 누리지 못했다. 휴대폰 화면을 켰다. 손가락이 떨려왔다. 태호 형이 보낸 톡이 맞았다.

 

"처음에 새우장을 같이 먹은 사람은 동생 태호가 맞습니다. 그다음부터는 다 저였어요. 동생은 한 달 전 완치판정을 받아서 한국에 나왔다가 재발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태호는 한수연 씨에게 아픈 걸 밝히기 싫어했습니다. 자기 때문에 병실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게 할 순 없다고요. 그런데 병이 나으니 수연 씨가 보고 싶어 온 거예요. 다시 발병해서 돌아가야 했기에 저에게 부탁했어요. 수연 씨가 태호가 잘 있다고 믿게만 해달라고요. 그래서 대역을 하게 된 겁니다. 다행히 동생은 수연 씨에게 제 존재를 밝히지 않았더군요. 하긴 그놈은 조기유학 때부터 약쟁이가 된 저를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어요. 이게 도움이 될 때도 있네요. 참, 태호가 쓴 편지가 있어요. 수술 바로 전 사망할 수도 있다는 의사 말을 듣고 죽으면 수연 씨에게 전달해 달라고 했어요. 일단 이거 보시면 조금이라도 동생을 이해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톡을 다 읽자 그는 사진을 하나 전송했다. 누렇게 빛이 바랜 병원 메모지였다. 평소 반듯했던 그의 글씨가 아니었다. 삐뚤 삐뚤 불안정해 보였다. 물기 어린 얼룩도보였다.


 



수연에게


병원에서는 반반 확률이라고 했는데, 의사인 친구에게 물어보니까 그 정도면 거의 죽는다고 하더라. 그 순간 내가 죽는다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어. 다만 내가 죽으면 너는 어떻게 되지? 그 질문이 떠오르니 그땐 정말 하늘이 무너져 내렸지.


처음 널 만났을 때는 내가 널 바라보는 눈길로 네가 날 바라봐 주기를 그렇게 원했는데

아니 내가 널 좋아하는 만큼 네가 날 좋아하지 않을 까봐

우리가 같은 마음이 아닐까 봐 정말 두려웠는데

죽는다니까 내가 너에게 첫눈에 반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널 좋아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네가 날 좋아하지도 않았고, 너에게 난 아무 존재도 아니었을 텐데. 그러면 죽어도 괜찮을 텐데.


만약 내가 널 사랑하는 것만큼 네가 날 사랑한다면, 그래서 네가 죽으면 난 어떨까 생각해 봤어. 그럼 내 죽음을 경험하는 너를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


너가 사라진다면,

네가 이 세상에 없다면,

내 병아리가 없어진다면,

내가 매일 털을 골라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톡톡 쪼는 부리에 입맞춤해주고,

콩콩 쌀을 잘 쪼아 먹나 지켜보았던,

내 소중한 병아리가 없어진다면,

내 삶은 이제 아무것도 아니지.

네가 없는 세상은 그냥 죽음과도 같은 무의 세계였어.

어떤 즐거움도 고통도 없는 사물과 같은 생물로 살아가겠지.

 

만약 너도 내가 죽고 그렇게 된다면. 수연이 네가 그런 일을 겪는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야.


어떻게 하면 내가 죽은 후에도 네가 가장 덜 상처받을 수 있을까 생각해 봤어. 

니가 날 좋아하지 않았으면 아니 네가 날 미워했으면 했어. 

그래서 갑자기 이별을 고했던 것이고.


그다음에는 서서히 멀어지는 거야. 초등학교 오 학년쯤, 가장 친했던 친구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어. 보고 싶다고 울고 불고 했지. 처음에는 편지 보내고 전화도 하고 그랬는데 일 년이 지나니까 서서히 연락이 뜸해졌어. 중학교 올라가서 다른 친구들을 사귀고 나니 자연스레 잊혀지더라고. 생각도 잘 안 더라. 그냥 그런 친구가 있었지 그 정도였어.  


내가 너에게 옛 기억이 되는 게 내 바람이야.

그래 줄 수 있겠지?....                                                                                              

 

                                                                             - 태호 가 -


카톡.

태호 형은 사진을 한 장 더 전송했다. 편지 뒷장이었다.




심장이 뛸 때마다 보고 싶어. 내 병아리.

처음 본 순간부터 지금까지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눈이 감겨오는 지금 이 순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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