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니가 만난 게 선배 형이라고?! 말도 안 돼. 지수가 꽤 가까이서 봤다는데? 둘이 같이 학생회 활동을 한 게 삼 년이야. 삼 년! 잘못 봤을 리가 없어. 한두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지혜는 속사포로 말을 쏘아댔다. 흑인 억압이 담겨있었다면 훌륭한 랩이 되었을 것이다. 선미는 인상을 구겼다. 짜증이 나 보였다. 손등으로 입가에 튀긴 지혜의 침을 훔쳤다. 흥건해 손등을 휴지로 닦아야 했다. 취조를 당하는 기분이었다. 조목조목 따지면서 대답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그랬다. 사실 수연선배 소식을 들었을 때 내심 반가웠다. 내가 보험 하는 거 어떻게 아시고 연락을 주셨을까. 이왕지사 가입할 거 후배에게 해주고 싶으신가 보다. 착하시다더니 진짜 마음 고우신분이네 좋게 생각했다. 지수가 연락처 알려줘도 되냐고 했을 때 제가 먼저 수연선배한테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이유였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래서 나름 프로페셔널하게 보이려고 오늘 정장도 입고 화장도 했다. 심지어 수연선배 생애주기에 맞춘 보험 포트폴리오까지 짜왔다. 새로운 고객님을 위한 준비완료!
후.. 웬걸?! 자다가 봉창을 두들겨도 유분수지. 뭔 일이다냐? 내가 지금 태호선배랑 불륜이고, 그걸로 둘이 이혼을 했다고?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네. ㅆ발. 학교 졸업하고서는 선배 그림자도 본 적 없거든? 꿈에서나 첫사랑으로 등장했지만 쩝. 그건 내 의사와는 상관없는 거고.
암튼 지금 ㅈ된 상황 어쩔 거야? 상간녀 오해를 풀자고 태호선배가 X이 없다느니, 만난 게 형이라는 둥. 이런 말을 다 하면 어쩌? 보험계약할 때 비밀 서약까지 했잖아. 근데 그 말을 하면 어떻게? 그러니까. 미치겠네. 진짜. 말은 왜 해가지고. 내가 미친년이지. 그래 미친년이야. 그렇다고 또 어떻게 말을 안혀?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상간 X 되게 생겼는데? 우리 엄마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고 우리 세 자매 지하 단칸방으로 내몬 게 그 ㅆ년 때문이었잖아? 근데 내가 그런 녀언이라고? 이건 안되지. 세상이 무너져도 그건 될 소리가 아냐. 인간이 멍멍하며 살 순 없는 거야.
그럼 비밀서약 위반은? 고소당하면은 그거 어쩔껴? 아 씨. 지금이라도 말이 헛나갔다고 할까? 술 마시고 왔다고 해? 근데 이렇게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해? 진심?? 변지혜 꼬락서니 봐. 지금 눈에 쌍 라이트 켜졌어. 누가 보면 지가 조강지처 줄 알겠다니까. 저런데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아? 그 옆에 미래의 내 고객님, 수연 선배는 어쩌? 황망, 아니 저 황당한 눈빛은 어쩔껴? 저걸 해결해야 실비보험이라도 가입시킬 거 아녀? 근데 왜 자꾸 고향말투가 나오는겨? 그러다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 안 그래도 촌닭인데 티 날라. 조심해야겠다.
선미의 머릿속은 수십 차례 오간 실뜨기 마냥 뒤엉켜 있었다.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해메였다. 비밀서약을 지키는 게 나은지, 상간녀 오명도 벗고 고객을 얻는 게 더 유리할지 고심했다.
쿵!! 하는 소리가 났다. 테이블 위에 올려둔 선미의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지혜가 주먹으로 테이블을 친 것이었다.
아, 씨. 이러다가 죽빵 날아오는 거 아냐? 저 등치로 원투 쓰리 뽑는 다면 큰일인데. 지금도 실리콘이 조금씩 내려오고 있는데 여기서 맞으면 바로 들창코야. 구축 심해서 재수술해도 장담 못한다는데. 걍 말해? 비밀 유지 계약은 어쩌꼬? 아 몰랑. 지금 옥수수 털리게 생겼는데 그게 대수야? 그래 일단 머리를 비우고 아가리를 털자.
"야, 너는 뭐 목에 확성기 꽂았냐? 왜 이렇게 크게 말해. 안 그래도 상간녀니 뭐니 해서 지금 여기 아줌마들이 다 나 노려보고 있거든? 솔직히 이 뜨거운 시선 안 느껴지냐? 한두 마디만 더 하면 모르는 사람들한테 머리채 잡히게 생겼다고. 말해줄 테니까 조용히 해."
선미는 말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나중에는 입에 두 번째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쉿을 덧붙였다.
"내가 만난 사람은 태호선배 형이야. 세 번쯤 만났어. 지수는 태호 선배라고 봤을 수도 있어. 쌍둥이 형이니까. 나도 처음 만났을 때 태호 선밴 줄 알았어. 아무리 일란성이어도 그렇지. 너무 똑같은 거야. 하도 기가 막혀서 신분증 꺼내보라고 했다니까. 그랬더니 정부 24인가 들어가서는 가족관계 증명서를 보여주더라. 근데 동생에 기태호가 있는 거야. 그것도 생년월일이 똑같애."
뭐? 쌍둥이 형? 수연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태호랑 알고 지낸 지 십 년이었다. 그런데 형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것도 일란성 쌍둥이? 왜 말하지 않았지? 내게 숨길 이유가 없는데? 커다란 퀘스쳔 마크가 수연의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퍼즐을 맞추듯 그동안의 미스터리가 하나둘씩 맞아 들어가고 있었다. 혹시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게 설마 태호 쌍둥이형? 설마.. 그간 행동을 반추해 보니 모든 게 이상했다.
헤어진 후 삼 년 동안 연락 한통 없었다. 갑자기 한 달 만에 다시 나타났다. 외모는 똑같은데 뭔가 달랐다. 수연은 평소 쓰는 물건도 오늘 산 것처럼 느낄 때가 있었다. 매일 신는 슬리퍼인데 오늘 처음 사서 신는 것 같은 익숙하지만 어색한 느낌. 요즘 태호를 만나면서 수연은 그걸 느꼈다. 익숙한데 마치 새것을 보는 것 같은 느낌. 사람은 변하는 거니까, 3년 동안 미국에 있었으니까 변했을 거야. 이해하며 어물쩍 넘어갔다. 왜냐면 쌍둥이 형이라는 의심은 뭐 소설에나 나올 법한 얘기니까.
태호와 우리로 지낸 게 십 년이었다.
"너랑 나랑 꼬맸으면 좋겠다. 그럼 늘 같이 있을 수 있잖아. "
태호는 제 팔뚝과 수연의 팔뚝을 포개었다. 마치 제 손가락이 바늘이 되는냥 위에서 쿡쿡 찔렀다. 그리고 밑으로 쑤욱하고 실을 뽑는 척했다. 수연은 판토마임을 보는 듯했다.
"자 이제 다 됐어. 이제 붙은 거야. 떨어질 리 없겠다."
헤헤하며 태호가 멋쩍게 웃었다. 그리고 그렇게 둘은 꿰매며 커플이 되었다. 그 후 십 년의 시간 동안 그들은 늘 붙어 있었다. 그래서 수연은 태호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다. 요새 태호는 십 년을 알아온 그와 뭔가 달랐다.
목소리부터 약간 하이톤이었다. 태호에게 첫눈에 반했던 동굴 같은 중저음이 아니었다. 발음도 약간 어눌했다. 미국에서 너무 영어만 해서 그런가 생각했다. 말투도 평소와 약간 달랐다. 자꾸 달라졌다고 이야기하니 그는 전화통화랑 만남을 피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톡이나 문자로만 소통하길 좋아했다. 그것도 평소 답지 않았다. 태호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는 톡을 보낼 때도 꼭 다시 읽어 수정했다. 주어와 서술어 호응이 어색한 비문까지 고쳐 보냈다. 그러나 3년 만에 돌아온 그는 맞춤법 고자가 되어있었다. 미국서 3년간 영어만 썼다고 해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런데 왜 쌍둥이 형이 태호 인척 나에게 연락을 했을까? 그건 그렇고 X이 없다는 건 뭐야? 3년 전까지만 해도 있었는데 어떻게 갑자기 없어져? 내 기억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 내가 치매도 아니고 그걸 기억 못 한다고? 어제 20년 전 중학교 담임선생님도 길 가다가 알아보는 나인데? 그래 이건 말도 안 돼. 그럼 사고라도 당한 건가 아님 병?
한 개였던 물음표는 수십 개가 돼서 수연의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부터 물어봐야 하지? 지금 당장 태호 형에게 연락을 해볼까? 아니야. 지난 이주 동안 연락 잘 안 되었잖아. 당신이 쌍둥이 형이라는 걸 알고 있어라고 보내면 도망쳐 버릴지도 몰라. 일단 선미 이야기 들고 보고 전략을 세우자. 쌍둥이 형인걸 안 이상, 지금 상황은 내게 유리하다.
수연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선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양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