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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iNG Oct 15. 2022

편백 베개에게 졌다.

삶의 굳은살이 베이기까지

여전히

높은 베개를 좋아한다. 낮은 베개를 두어 개 포개어 높게 베기도 한다. 그러다 오래된 베개를 바꾸었다. 열심히 고르고 고르다 편백나무 큐브로 채운 베개를 주문했다. 단단하고 적당한 높이의 베개 모양새에 만족했다.


그러나 자다가 사단이 발생했다. 아무리 손톱만 한 나무 조각이어도 나무는 나무였나 보다. 머리가 저릴 정도로 아프게 배겨서 잠에서 깼다. 처음엔 잠결이었으나 두, 세 번 깨면서 베개에게 호되게 당하고 있었다.


여태껏

루하루 살아내어 오면서 나름 몸 곳곳에 굳은살이 베일 정도로 고생했다 생각했는데, 머리는 그런 부위가 아니었나 보다.


삶의 무게만큼이나 깊고 두껍게 잡힌 굳은살들은 그 사람이 얼마나 괴로운 시간들을 보내왔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난 머리조차 단단해지지 못한 삶에 있어서의 애송이었나 보다.


아마도

자신의 인생에 대해 장인정신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것이다. 굳은살이 벨 정도로 한 분야에서 오랜 고뇌를 견뎌야 장인이 되듯이, 직업이 아닌 인생 자체에 장인정신을 가지고 진심으로 살고 싶다.


마도 대부분은 바쁜 생활로 인해 자신의 인생을 제대로 돌아보지도, 케어하지도 못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저 습관처럼 잠들기 전까지 하루 일과를 다 할 뿐.


누구나 인생이 처음이라 서툴겠지만, 떨어지는 물방울에 바위가 파이듯이 인고의 시간 속에서 나를 완성해가는, 오늘의 한걸음은 여전히 무겁기만 하다.


어느덧

적지않은 나이에도 아직도 서툴고 부족한 점이 많다.

삶의 스킬이야 배우고 연마하면 되지만 신체는 고쳐쓸 수 없는 1회용인 게 참 안타깝다.


기계도 50년을 쓰지 못하는 데, 하물며 사람 몸뚱이를 그만큼 썼으니 당연히 여기저기 고장 나고 삐걱댈 수밖에. 아무리 발버둥 쳐도 100년도 못 사는데 말이다. 


여느 만화처럼 미래에는 몸통을 바꿔 끼울 수 있을까? 영화 Get Out처럼 남의 젊은 몸에 내 영혼을 담아 영생을 살 수 있을까? 이것도 다 미련이고, 부질없음이리라.

게다가 고작 베개에게 지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졌잘싸

결국 문제의 베개와는 적당한 타협을 했다. 조금 두께가 있는 커버를 씌우고는 한결 나아졌다. 조금 더 지나면 익숙해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편안하게 꿈도 꾸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다행히 편백의 향은 너무 좋아서 마치 숲 속에서 자고 있는 듯한 기분으로 잠들 수 있다.

실제 숲에서 잤다가는 내 몸이 온갖 벌레로 가득하겠지만. 

(몇 년 전에 축령산 자연휴양림에 캠핑 갔을 때 밤새 벗어놓은 수영복 위에 진짜 주먹만 한 시커먼 메뚜기 같은 애가 앉아 있어서 기겁을 한 적이 있다.)

벌레를 100% 진심을 다해 싫어하는데, 그중 특히 거미 -사실 거미는 벌레가 아니고 절지동물이지만- 아무튼 다리 많은 애들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글을 쓰다 노파심에 흡습제 여러 개를 베갯속 편백 조각 사이에 넣어 두었다. 혹시나 땀 때문에 축축해져서 벌레가 생길까 봐 미리 철벽방어를 해 두었다.


모쪼록 잘 부탁한다, 편백베개야. 내가 너를 솜사탕처럼 여기는 그날까지.


by TiNG

v.1.0

ps. 피그먼트가 머지? 돼지인가? 찌고 삶았단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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