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고객

무뚝뚝한 아버지가 딸에게 자랑한 이유

by 최덕호

지금까지 매장 뒤편의 어두운 이야기를 많이 썼다. 쉬지 못하는 사람들, 밥을 못 챙기는 사람들, 사과가 습관이 된 사람들. 다 현실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매장 뒤편이 늘 힘들기만 한 곳은 아니다.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매일 현장에 나오는 분들이 있다. 고객을 만나는 게 좋아서, 물건을 설명하는 게 재미있어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순간이 뿌듯해서 이 일을 계속하는 사람들. 나는 그런 분들을 많이 봐왔다.


그리고 고객도 마찬가지다. 일부 대하기 어려운 분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대다수의 고객은 매장 직원에게 친절하다.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이름을 기억해주고, 다음에 또 찾아와주시는 분들. 현장을 버티게 하는 힘은, 사실 이런 분들에게서 나온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서울 남쪽에 있는 한 창고형 대형마트. 이곳에서 5년째 프로모터로 일하고 계신 분이 있다. 오십대 중반의 여성분, 정미 여사님(가명).


정미 여사님은 식품부터 리빙, 가전, 건강기능식품까지 두루두루 판촉을 하시는 분이다. 브랜드가 바뀌어도 매장은 같으니, 5년이면 이 마트의 거의 모든 코너를 거치신 셈이다. 그래서인지 이 분은 매장 구석구석을 손바닥처럼 알고 계시고, 어디에 뭐가 있는지 물어보면 바로 안내해주실 정도다.


그런데 정미 여사님에게 가장 특별한 점은 상품 지식이 아니다. 사람을 기억하는 능력이다.


자주 오시는 고객님이 있으면 꼭 성함을 여쭤본다. 그리고 다음에 오시면 "어머, ○○ 회원님 오셨어요?"라고 먼저 인사를 건넨다. 시식 상품이 나오면 따로 챙겨두셨다가 "이거 지난번에 맛있다고 하셨잖아요, 오늘 나왔어요" 하면서 전해드린다. 조그만 판촉물이라도 정성스럽게 건네면서 따듯한 말 한마디를 잊지 않으셨다.


매장에서도 늘 친절한 분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마트 직원들도 "정미 여사님 계신 코너는 분위기가 달라요"라고 말할 정도였다. 나도 현장에 갈 때마다 여사님이 고객과 살갑게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봤는데, 멀리서 보면 아는 사이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날 처음 만난 고객인 경우도 많았다. 그냥 그게 여사님의 방식이었다.


몇 달 전, 여사님이 홈 리빙 제품 행사를 담당하게 되셨다. 꽤 고가의 매트리스 제품이었다. 이런 제품은 충동구매가 아니라 여러 번 방문해서 비교하고 고민한 뒤에 결정하는 경우가 많다.


행사 기간 중, 나이가 지긋하신 남성 고객 한 분이 오셨다. 제품을 이리저리 만져보시더니 이것저것 물어보셨다고 한다. 소재는 뭔지, 단단한 건지 푹신한 건지, 허리가 안 좋은 사람한테 맞는지. 여사님은 아시는 대로 꼼꼼하게 설명드렸을 것이다.


그 고객분은 그날 사지 않고 돌아가셨다. 그런데 이틀 뒤에 또 오셨다. 같은 질문을 다시 하셨다. 여사님은 처음 설명드리듯이 다시 자세하게 답변드렸다. 그리고 또 이틀 뒤에 세 번째 오셨다. 이번에는 조금 다른 질문들이었다. 배송은 어떻게 되는지, 설치할 때 뭘 준비해야 하는지, 오래된 제품은 수거해가는지.


세 번씩 방문하시면서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면 솔직히 지칠 수도 있다. 그런데 여사님은 달랐다. 오히려 세 번째 오셨을 때 "회원님, 이번에는 마음이 좀 기우셨어요?" 하면서 웃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혹시 제가 설명드린 것 외에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 전화 주세요" 하면서 본인 휴대폰 번호를 적어서 드렸다.


고객분은 결국 그날 구매를 결정하셨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품 배송과 설치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설치 위치나 사이즈 관련해서 확인이 필요한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고객분이 여사님에게 전화를 하셨고, 여사님은 본인이 직접 확인하면서 하나하나 처리를 도와드렸다. 프로모터 업무 범위를 넘는 일이었지만, 여사님은 "내가 판매한 건데 끝까지 책임져야지"라는 마음으로 신경을 쓰셨다고 한다.


설치가 끝나고, 고객분에게 "잘 되셨죠?"라고 확인 전화를 드린 게 마지막이었다. 그렇게 한 건의 판매가 마무리됐다. 여사님은 다음 행사 제품으로 넘어가 다른 브랜드 판촉을 하고 계셨다.


그로부터 2주쯤 지난 어느 오후였다고 한다.


여사님 휴대폰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젊은 여성 목소리였다. "혹시 정미 선생님이세요? 지금 매장에 계세요?"


여사님이 네, 계신다고 했더니, 잠깐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10분쯤 뒤, 서른 초반쯤 돼 보이는 여성분이 매장으로 찾아오셨다. 여사님을 보자마자 연신 인사를 하시면서 "감사합니다, 너무 감사해요"를 반복하셨다고 한다.


여사님은 처음에 누군지 몰라 당황하셨다. 그 여성분이 설명을 하셨다.


"저, 얼마 전에 매트리스 사 가신 고객의 딸이에요."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내밀었다. 안에는 건강식품 세트 하나와 따뜻해 보이는 머플러, 그리고 접힌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여사님이 나중에 그 편지를 사진 찍어서 메시지로 보내주셨다. 정성스러운 손글씨였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지난번 매트리스를 구매하신 고객의 딸입니다.


아버지가 귀가 잘 안 들리시고 몸도 불편하셔서, 매장에 가시는 것도 쉽지 않으셨을 거예요. 그런데 몇 번이나 찾아가서 같은 질문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번거로우셨을 텐데 한 번도 귀찮은 내색 없이 잘 알려주셨다고요.


사실 아버지가 저한테 자랑을 하셨어요. 무뚝뚝한 분이라 평소에 그런 말씀을 잘 안 하시거든요. 근데 그날은 '거기 직원이 참 친절하더라, 설명을 잘 해줘서 좋았다'고 하시면서, 설치할 때 전화로 도와준 것까지 이야기하셨어요.


아버지한테 그런 말을 들은 게 솔직히 처음이에요. 뭔가를 사고 나서 좋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는 분이거든요. 그런 아버지가 좋았다고 하신 건, 물건이 아니라 선생님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해요.


조그마한 정성이지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건강하시고, 앞으로도 좋은 일만 있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여사님은 그 편지를 읽고 매장 뒤쪽에서 많이 우셨다고 한다.


"저 이 일 5년 했는데, 이런 건 처음이에요. 매일 '어서 오세요' 하고, '감사합니다' 하고, 가끔 '죄송합니다' 하고. 그게 제 하루거든요. 근데 이렇게 일부러 찾아와서 편지까지 써 주시는 분은 처음이에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근데 특별한 걸 한 게 아니잖아요. 그냥 여러 번 오셨으니까 여러 번 설명드린 거고, 전화 오셨으니까 전화 받은 거고. 그게 이렇게 큰 일이 될 줄 몰랐어요."


맞다. 여사님은 특별한 걸 하지 않았다. 그냥 자기 일을 했다. 다만 그 방식이 사람에게 닿은 거다.


세 번 방문하셨을 때 귀찮은 표정 대신 "이번엔 마음이 기우셨어요?"라고 웃은 것, 전화번호를 적어드리면서 "언제든 연락 주세요"라고 한 것, 설치 후에 "잘 되셨죠?" 확인 전화를 드린 것. 하나하나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그게 모이면 누군가에게는 자랑하고 싶은 경험이 된다. 무뚝뚝한 아버지가 딸에게 "거기 직원이 참 친절하더라"고 말하게 될 만큼.


나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한동안 생각했다. 우리가 현장 직원들한테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고 교육을 많이 하는데, 정작 현장에서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매뉴얼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가진 살가움, 꼼꼼함, 끝까지 챙기는 성실함. 그건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거다.


다만 하나는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이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 정미 여사님 같은 분이 지치지 않고, 쫓기지 않고, 자기 방식대로 고객을 만날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게 관리자인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여사님이랑 지금은 같이 일하지 않지만 아마도 그 편지를 종종 보실 것이다. 힘든 날이면 꺼내면서. 한 장의 편지가, 5년차 프로모터의 오늘을 버티게 하지 않을까?


솔직히, 나도 그 편지 사진을 받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관리자라는 사람이 매일 실적과 보고서만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정작 현장에서 가장 큰 힘이 되는 건 이런 거였구나 싶어서.


이 글을 혹시 매장에서 일하는 분이 읽고 계시다면, 말씀드리고 싶다. 당신이 한 작은 친절을 기억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다. 다만 대부분은 말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이 글을 매장을 찾는 고객의 입장에서 읽고 계시다면, 한 가지만 부탁드리고 싶다. 다음에 매장에서 좋은 경험을 하셨을 때, 그 한마디를 건네주시라. "덕분에 좋은 상품 구매했어요." 그거면 충분하다.

그 한마디가, 오늘 하루 종일 서 있던 사람의 내일을 만든다.


image.png 좋은 물건이 아니라 좋은 사람을 만났다고, 무뚝뚝한 아버지가 딸에게 처음으로 자랑했다.

HR/아웃소싱 20년차 직장인입니다. 리테일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고 키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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