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습관이 된 사람의 표정이 달라지기까지
매장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뭘까. "어서 오세요"가 아니다. "죄송합니다"다.
상품 배송이 하루 늦어도 죄송하고, 고객이 찾는 사이즈가 품절이어도 죄송하고, 원하는 스타일로 매칭이 안 돼도 죄송하고, 매장이 추워도 죄송하고 더워도 죄송하다. 잘못한 게 없어도 죄송하다. 하루에 열 번은 넘게 이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매장 위에 서 있다.
서울의 한 백화점 명품 편집 스토어에서 매니저를 맡고 있는 수연 님(가명). 15년차 경력자다. 도시적인 이미지에 업무도 똑부러지게 처리하는 분이다. 브랜드 지식도 풍부하고, 고객 응대도 노련하다. 이 업계에서 15년을 버틴다는 건 보통 내공이 아니다.
그런 수연 님도, 매일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죄송합니다"를 밥 먹듯이 한다고 했다. 한번은 수연 님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물어본 적이 있다. "하루에 죄송하다는 말 몇 번 정도 하세요?" 수연 님이 웃으면서 답했다. "세어본 적은 없는데요, 아마 진심으로 죄송한 건 한두 번이고, 나머지는 그냥… 습관이에요."
습관. 그 단어가 걸렸다. 죄송하다는 말이 습관이 된 사람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나는 수연 님이 고객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늘 단정하고, 늘 침착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표정에서 감정이 빠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웃고 있는데 웃는 게 아닌 얼굴.
얼마 전, 그 매장에서 일이 생겼다.
매장 내 다른 스태프가 고객 응대 과정에서 실수를 했다. 동료사원이 크게 잘못한 건 아니었지만, 고객이 민감하게 받아들이셨다. 지적이 시작됐고, 이야기가 커졌다. 결국 백화점 본사까지 클레임이 올라갔다.
첫 번째 사과는 수연 님이 했다. 매장 매니저로서 고객을 직접 만나 정중하게 사과드렸다. 고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번째 사과는 백화점 층 담당자가 했다. 평소 이런 자리에 나서는 일이 거의 없는 분인데, 직접 고객을 찾아가 머리를 숙였다. 그래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 번째는 내가 나갔다. 전체 운영 책임자로서 고객을 만나 고개를 숙이고, 이번 일의 경위를 설명드리고, 향후 어떻게 처리할지, 재발 방지는 어떻게 하겠는지를 구체적으로 말씀드렸다. 감정적인 사과가 아니라, 원인과 대응을 담은 사과였다. 그제야 고객의 표정이 풀리셨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했다. 세 번의 사과가 있었는데, 왜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안 되고 세 번째에서 풀렸을까.
수연 님의 사과가 진심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진심이었을 거다. 그런데 수연 님의 사과는 "죄송합니다" 그 자체였다. 감정을 담아 고개를 숙이는 것. 매장에서 15년 동안 해온 방식 그대로였다. 층 담당자도 마찬가지였다. 사과의 무게는 있었지만, 방식은 같았다.
내 사과가 받아들여진 건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다. 사과 안에 대응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이 잘못됐고, 왜 그랬고,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 고객이 원한 건 감정적인 사죄가 아니라, 이 문제가 해결되겠다는 확신이었던 거다.
그때 깨달았다. 우리가 현장 직원들에게 서비스 교육이라는 명목 하에 "죄송합니다"를 가르치고 있었지만, 정작 그 뒤에 붙어야 할 말은 가르치지 않고 있었다는 걸.
그 뒤로 운영 매장의 고객 응대 지침을 하나 바꿨다. 단순히 사과부터 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설명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대응형 응대를 기본으로 잡은 거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확인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처리해드리겠습니다"가 붙도록.
그리고 한 가지 더. 고객 클레임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스태프가 끝까지 안고 가지 않아도 된다는 원칙을 세웠다. 관리자가 나선다. 사과의 단계를 나누되, 각 단계마다 역할이 다른 거다. 스태프는 초기 응대, 매니저는 상황 정리, 관리자는 해결과 마무리. 한 사람이 사과를 열 번 하는 것보다, 세 사람이 역할을 나눠 한 번씩 제대로 하는 게 낫다.
수연 님에게 바뀐 지침을 설명하고 나서, 며칠 뒤 전화가 왔다.
"실장님, 어제 고객 클레임이 있었는데요, 저는 상황 설명까지만 하고 다음 단계로 넘겼거든요. 그랬더니 고객님도 오히려 빨리 정리가 되셨어요. 근데 제가 좀 놀란 건, 퇴근할 때 기분이 다르더라고요. 예전 같으면 하루 종일 찝찝했을 텐데."
퇴근할 때 기분이 다르다. 그 한마디가 많은 걸 말해준다.
"죄송합니다"는 필요한 말이다. 없어져야 할 말이 아니다. 다만 그 말이 사람을 지키는 쪽으로 쓰여야지, 사람을 닳게 하는 쪽으로 쓰여선 안 된다.
15년 동안 매장에서 버텨온 사람이, 죄송하다는 말이 습관이 되어 감정이 빠진 표정으로 서 있는 건 정상이 아니다. 그건 프로인 게 아니라, 구조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거다.
사과 대신 대응을 가르치고, 혼자 열 번 사과하는 대신 역할을 나눠주는 것. 대단한 변화가 아니다. 그런데 그 작은 차이가, 퇴근길 표정을 바꿔놓는다.
매장 위에서 오늘도 "죄송합니다"를 말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그 말의 무게를, 당신 혼자 지지 않아도 된다.
HR/아웃소싱 20년차 직장인입니다. 리테일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고 키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