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이면 달라지는 사람

이력서의 빈칸보다 메모 한 줄이 남긴 것

by 최덕호

채용 담당을 오래 하다 보면 이력서를 보는 눈이 생긴다. 경력란에 백화점 또는 리테일 경험이 있는지, 브랜드 판매 유경험자인지. 특히 팝업스토어처럼 단기에 성과를 내야 하는 매장은, 첫날부터 바로 투입 가능한 경력자를 넣는 게 기본이다. 가르칠 시간이 없으니까.


그런데 가끔, 이력서의 빈칸보다 한 줄의 메모가 눈에 밟힐 때가 있다.


얼마 전 여의도의 한 대형 백화점에서 리빙 브랜드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공예와 디자인 소품을 다루는 매장이라, 상품 지식이 없으면 고객 응대가 어려운 구조였다. 알바 사이트를 통해 지원서가 들어왔는데, 한 이력서가 걸렸다. 스물다섯, 남자. 판매 경력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력서 상단 메모란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공예를 전공했습니다. 이 브랜드의 소품과 디자인 모두 오래 전부터 좋아했고, 제가 직접 고객에게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꼭 갖고 싶습니다."


구구절절이었다. 보통 채용 담당자는 이런 메모를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경력란이 비어 있으면 거기서 끝이니까. 그런데 묘하게 눈이 갔다. 전화를 해봤다. 역시나 경험은 부족했지만,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꼭 해보고 싶습니다. 기회만 주시면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이 정도 자신감이면 괜찮겠다 싶었다. 과감하게 투입했다. 그의 이름은 준형이(가명).


첫날, 전화가 쏟아졌다.


백화점 담당자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매장 진열이 브랜드 가이드와 다르다고. 이어서 고객사 임원한테서도 전화가 왔다. "전문 업체가 인력을 왜 그렇게 넣느냐." 솔직히 속이 쓰렸다. 준형이가 진열 배치를 실수했고, 고객 응대에서도 상품 설명이 매끄럽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주변에서는 교체하라는 분위기였다. 팝업스토어는 기간이 짧으니까, 적응할 시간을 줄 여유가 없다는 논리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친구의 메모 한 줄이 계속 떠올랐다. 좋아서 지원한 사람이다. 경력이 부족한 거지, 의지가 부족한 게 아니다.


교체 대신, 현장 매니저에게 부탁했다. 오늘 실수한 부분을 조목조목 정리해서 알려주되, 잘한 부분도 꼭 같이 이야기해달라고. 혼내는 게 아니라 방향을 잡아주는 거라고.


둘째 날, 매니저한테 메시지가 왔다.


"실장님, 그 친구 어젯밤에 브랜드 홈페이지랑 협업 작가 인터뷰 영상을 전부 찾아봤나 봐요. 오늘 고객한테 소재 설명하는데, 저보다 나은 것 같아요."


준형이는 전날 매니저가 짚어준 부분을 하나하나 고쳤고, 거기에 자기가 공예를 전공하면서 알고 있던 배경지식을 더했다. 디자인 철학, 소재의 특성, 작가의 의도. 그건 매뉴얼로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좋아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설명이었다.


셋째 날, 해당 주차 매출 목표를 달성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팝업 오픈 주에 목표를 찍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2주가 지나자 준형이가 있는 매장은 같은 기간 행사매장 중 가장 높은 매출을 기록했다. 고객사 임원이 직접 연락을 해왔다. "앞으로 팝업은 꼭 뉴비즈원하고 하겠습니다."


성과 보고를 마치고, 준형이에게 전화를 했다.


"준형 씨, 이번에 정말 고마웠어요. 덕분에 좋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잠깐 침묵이 있었다. 그리고 준형이가 말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솔직히 첫날 잘려도 할 말 없었거든요. 그런데 기회를 한 번 더 주셔서… 제가 좋아하는 걸로 처음 인정받은 거라, 좀 많이 떨립니다."


좋아하는 걸로 처음 인정받았다. 공예를 전공하고, 아마 주변에서 "그걸로 뭘 하냐"는 말을 적지 않게 들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한테 매장 위에서 고객이 "설명 잘 들었어요, 이거 살게요"라고 말하는 순간이 어떤 의미였을지.


채용에서 경력은 중요하다. 부정할 생각 없다. 그런데 경력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준형이 같은 사람은 영영 기회를 못 받는다.


사람을 오래 관리하면서 배운 게 있다. 사흘이면 달라지는 사람이 있다. 그건 능력이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라, 원래 안에 있던 게 밖으로 나오는 거다. 다만 그게 나오려면 조건이 필요하다. 실수를 한 번 허용해주는 것, 방향을 잡아주는 사람이 옆에 있는 것, 그리고 기다려주는 것.


그 셋이 갖춰지면, 이력서의 빈칸은 생각보다 빨리 채워진다.

나는 앞으로도 메모란을 읽을 것이다. 경력란보다 거기에 그 사람이 있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으니까.


image.png 첫 출근하는 동료사원들이 상품교육을 열심히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매번 절로 흐뭇해진다.



HR/아웃소싱 20년차 직장인입니다. 리테일 현장에서 사람을 만나고 키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