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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광머리 앤 Nov 11. 2016

그녀들이 사는 법 2

안나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등을 쓴 브론테 자매가 살았던 하워스에 갔다. 

전날 스코틀랜드 인버네스에서 스코티쉬 보이프랜드도 못 만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잉글랜드가 마지막 챈스다.


보름이 살짝 지났지만 달이 아직 둥그랬다. 전생에 늑대였는지 보름달만 보면

환장을 하는 나는 침대칸에 안 누워있고, 창가에 쪼그리고 앉아 달을 보며 갔다.


하얀 달과 검은 숲을 보며 자다 깨 다자다 깨다 했다.

새벽 4시 반에 프레스턴에 도착해서 다시 기차표를 끊었다.

프레스턴에서 키슬리까지 아무 때나 아무 기차나 타고 가는 

기차표를 비싸게 하나 끊고 우선 플랫폼 1에서 기다렸다.

플랫폼 2로 바뀌기에 무거운 가방을 끌고 계단을 오르내렸다.

공사 중이라 계단밖에 없어서 새벽부터 힘을 썼다. 

그런데 바뀐 플랫폼에서 연착되는가 싶더니 기차가 없어져 버렸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다시 요크 가는 기차를 기다렸다. 분명히 요크 가는 기차를 탔는데 리즈에서 안 움직인다. 

조금 있다가 차가 고장 났다고 여기서 다 내리란다. 세상에 이런 경우가 다 있나?


뜻하지 않게 리즈에서 내렸는데 사람들이 

거센 물결처럼 빠르게 지나간다. 출근시간인데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를 피하려고 잠시 역 앞 스타벅스에서 쉬기로 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며 앉아 있다 졸다 하다가 리즈 구경에 나섰다.

역 앞 보관소에 짐을 맡기고 리즈 구경을 했다 의외로 쇼핑몰이 많아서 몇 가지 좀 사고 베트남 

국수를 먹고 다시 기차를 탔다.


키슬리에서 내려 하워스 가는 버스를 탔다. 비가 부슬부슬 오고 날씨도 춥고 새벽부터 가방을

끌고 이리저리 다녀서 버스를 탔을 때는 기운이 쭉 빠져 있었다. 아직 2시도 안됐는데


이렇게 하워스 간 사정을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안나를 만날 때 내가 얼마나 지친 상태였던가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큰 가방 두 개에 핸드백 하나, 우산을 들고 안나네 집에 들어섰을 때는 춥고 다리 아프고 배도 고팠다.

근데 안나네 집은 난장판이었다.


사진에서 본 거랑 다르잖아. 내 얼굴이 나도 모르게 일그러졌는지 안나가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집이 어질러져서 미안하다고 하며 차 한잔 하겠냐고 묻는다. 차를 마시겠다고 하니 싱크대에 선다.

다시 차를 마시겠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하니 물을 올린다. 좀 있다 설탕 넣느냐고 한다. 그렇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시 묻는다. 좀 있다 설탕을 몇 개 넣느냐고 한다. 뭘 물어보고 한참 수다 떨다가 또 물어보고


영국 아줌마나 한국 아줌마나 대화중 깜빡깜빡하며 다시 묻는 건 만국 공통인가 보다. 

미안하다고 하길래 이해한다고 했다. 자기가 할머니란다. 부츠에 청자켓에 너무 젋어보이길래

너 진짜 젊어 보여 그랬더니 아니란다. 너 흰머리도 없는데? 그랬더니 싱크대 앞에서 달려오더니


머리를 헤집으며 여기 흰머리 많단다. 자기 헤어디자이너 덕분에 흰머리가 없단다. 

나도 흰머리 많다며 머리를 같이 헤집었다.


나이가 48살이고 아들은 29살, 딸은 22살인데 3살짜리 아이가 있단다. 내 영어가 딸려서

(프랑스의 뮤리엘 할머니는 나랑 영어 수준이 비슷해서 느리게 이야기했는데 안나는 말을

빨리 한다.) 무슨 연유로 2주에 한 번씩 에든버러에 가야 한단다. 딸아이와 손녀와 관련된 법정

문제라고 하는 것 같았다. 지금 같이 사는 남자의 이름은 로저다. 방에 딸이 쓴 봉투가 있길래 보았더니 맘 앤 로저라고 쓰여 있는 걸로 보아 아이들 아빠는 아닌 것 같았다.


늙어서 오늘내일하는 큼지막한 개 한 마리와(이름은 잊어버렸다), 고양이 두 마리를 키웠다. 개는 아주 순했다, 나만 보면 쫓아왔다. 심지어는 앞발을 내 무릎에 턱 올려놓았다. 안나 말은 어찌나 잘 듣는지..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단다. 숨 쉬는 소리가 거칠게 났다. 개를 무서워하는 나도 좀 쓰다듬어 주고 싶었는데 못 그랬다. 돌아다니며 개 먹을 캔이라도 사다 주고 싶었는데 한 번도 그러지 못했다. 개가 수술하고 응급실에 간 이야기를 하는데 정이 깊어 보였다. 


로저는 양복쟁이로 좀 수줍어하는 사람이어서 몇 마디 나누어보지는 못했다.


나중에 집을 나오다 보니 안나는 다림질을 업으로 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첫날도 다림질할 일거리를 쌓아놓고 있었던 것이다. 


안나가 안내해준 방에 올라가니 지난번 이태리 농가하고 분위기가 비슷하다. 좋게 말하면 

앤틱, 나쁘게 말하면 귀신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오만 오래된 물건들이 쌓여 있다. 삶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나로서는 내다 버렸어도 벌써 버렸을 물건들이다. 이런 집은 부처상이 있다. 




욕조가 아주 크고 좋은데 방에 문고리가 없다. 첫인상이 너무 난장판이어서 꼬투리를 잡으려 해도 시트도 깨끗하고 필요한 건 다 있다. 


오십넘게 살다 보면 첫인상에 견적이 나온다. 이 아줌마도 나랑 같은 부류인지 아닌지. 안나도 아마 나랑 같은 부류인 것 같았다. 사는데 꼭 필요한 건 없는데 필요 없는 건 있다. 욕조는 크고 좋은데 샤워기가 없는 안나의 욕실이 바로 그랬다. 12년 전에 유럽 가는데 식탁보는 가져가는데 숟가락은 안 가져간다. 바로 나다.


이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믿고(귀신 유령 전생 뭐 이런 거), 현실을 잘 모른다. 그러다 허당일 짚는다. 상상력은 풍부한데 디테일이 부족하다. 집 꾸며놓은 걸 보니 딱 그랬다. 


문고리가 없어 문을 잠글 수 없어 트렁크를 문 앞에 놓고 잠을 잤다. 거기서 세 밤을 잤는데 마지막 밤에는 트렁크도 안 가져다 놓고 잤다. 


떠나는 날 아침 안나랑 헤어지면서 악수를 했다. 좀 고단해 보이는 안나의 삶이 행복해지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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