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어 봄호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나를 부를 때 ‘빨리’ 라는 말을 빼놓지 않으셨다. 말도 느리고, 결정도 천천히 하고, 행동도 그렇다. ‘빨리빨리’를 신조로 삼고 ‘부지런히’를 모토로 삼는 현대의 한국사회에 그닥 맞지 않는 사람이다.
모든 것이 느린 충청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서울로 유학을 가서 지하철과 버스에서 느낀 충격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지하철에서 사람들은 뛰다시피 걸었다. 버스가 오면 빨리 타려고 버스와 같은 방향으로 미리 뛰었다. 나는 버스를 몇 번이나 놓쳤다. 그런 서울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다.
느려터진 내가 빠른 속도를 강조하는 한국사회에서 그나마 사람꼴을 갖추고 사는 게 용하다. 느림에도 뒤처지지 않은 것은 방향을 잘 잡았기 때문인 것 같다. 어디든 처음 가면 오리엔테이션을 한다. 오리엔테이션의 어원은 오리엔트, 즉 동쪽이란 뜻이다. 동쪽이 어디인지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다. 속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 방향이 문제다. 천천히 가도 방향만 맞는다면 잘못된 방향으로 빠르게 멀리 가는 것 보다 낫다.
느리면 가능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리포트나 숙제를 할 때, 빨리 쓴 사람들이 리포트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종합해서 쓸 수 있다. 결정을 할 때도 느리게 하면 가능한 많은 정보를 얻고 상황을 예측해 볼 수 있으므로 실패할 확률이 적다.
감정조차 느리게 움직인다. 일이 있고 며칠 지난 후 감정이 나중에 올라오기도 한다. 뒤늦게 화가 나고, 기쁘고, 분노한다. 그럴 때는 ‘왜 그때 바로 화를 내지 못했지?’하고 답답하다. 하지만 당장 화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은 적도 많다. 느린 감정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움직여서 결단을 내리기 쉽다. 그렇게 내린 결단은 돌이키지 않는다.
또 천천히 가면 자세히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한 번 가본 곳을 잘 잊지 않는다. 남들이 못 본 것도 볼 수 있다. 천천히, 자세히,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해진다. 같이 여행을 하면서도 남들이 못 본 것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한다.
이렇게 느린 나도 요즘 답답할 때가 있다. 이사 온 작은 도시가 너무 느리기 때문이다. 성당에서 미사를 끝내고 나오는데 노인들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가면 통로가 막힌다. 운전을 하는데 나이 드신 분들이 느릿느릿 지나가면 크락션을 누르고 싶다.
시장에서 감자 몇 알을 사기 위해 오래 기다려야 한다. ‘할머니 오래 기다렸어요.’하면 ‘고맙다’고 하며 감자 두 알을 더 넣어준다. 느리지만 넉넉하다. 6, 70년대에나 있었을 법한 여인숙이 골목에 숨어 있다. 빨리빨리 변해온 세상에서 속도를 늦추고 존재한 것들이 여인숙 뿐만은 아니다. 전당포도 있다. 광역시에서 중소도시로 이사를 온 것이 마치 빠르게 가는 기차에서 완행 기차로 갈아탄 기분이다.
나도 이 도시의 노인들처럼 점점 더 느려질 것을 안다. 관절이 아파서, 근육이 굳어서 더 느리게 움직일 것이다. 뭘 들어도 바로바로 이해가 가지 않을 것이다. 대답을 하려면 적당한 단어를 생각해 내기 위해 시간이 많이 걸리리라. 차를 타고 다니기 보다는 걸어 다닐 것이다. 벌써 며칠씩 차를 세워놓고 걸어 다니고 있다.
나도 여인숙이나 전당포처럼 빨리 변한 것들 사이에서 오래되고 느린 존재로 자리 잡을 것이다. 볕 좋은 곳에 쪼그리고 앉아서 천천히 지나가는 시간을 보며 꾸벅꾸벅 졸고 있을 노년의 내가 될 것이다. 그때에는 집을 떠나 배신당하고, 고통 받고, 탈탈 털린 아이들이 돌아와서 쉴 곳이 될 것이다. 나는 그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