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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광머리 앤 Apr 13. 2018

친정엄마가 가셨다.

오늘 아침, 갑자기 서울에 가신다고 하셨다. 


"엄마, 며느리가 구박하면 언제든지 와(농반이다. 결혼하고 이십 년 넘게 며느리가 모시고 살았다. 며느리의 고충 이해한다)"


"엄마 집짓기 시작하면 다시 와."


사실 동생이 직장에서 나오고 다시 새 직장으로 들어갔는데 집에서 멀었다. 당장은 원룸 얻어서 혼자 살며 주말부부를 했는데 다행히 새 직장 근처에 예전에 사놓은 아파트가 있어 그리로 이사 가려고 했다. 그런데 그 집에 방이 세 개. 엄마가 계실 방이 없다고 당분간 작은 누나네 집에 가 있으면 안 되겠냐고 했다.


사정을 듣고 엄마에게 

"당연하지. 언제든지 오세요." 


했더니 당신은 딸네 신세는 안 지신단다(조선시대 양반집 딸의 마지막 기개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씀이,

"너희가 내가 필요하다면 모를까."


그래서 

"엄마 우리 집 리모델링할 건데 공사 감독이 필요해요 감리비만 삼백이래."

했더니 

"그렇다면 모를까.."

하고 담날 득달같이 내려오셨다. 가방에 수평계, 줄자, 마스크 뭉치를 넣어서..


하나 공사는 6개월이 지나도록 진척이 없었고 아들네도 이사를 보류하고 눌러앉았다. 남동생이 다시 올라오시라고 한지 한 달이 넘었는데 오늘 올라가신 거다.


우리 집에 친정 모친이 계시다고 하니 주변 사람이 하는 말

"빨리 아들네로 보내라. 며느리가 시모 없는 즐거움을 알게 하면 안 된다. 나중에 노인네 갈곳 없어진다."


사실 나도 걱정이 안 된 것은 아니다. 사실 돌아가실 때까지 모셔야 할지도 모른단 생각도 했다. 


엄마가 있어서 좋았다.


평생 엄마가 직장에 다녀서 어린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왔는데, 오십 넘어서 "엄마!"하고 들어오면 머리가 허연 노모가 있어서 좋았다. 


엄마에 대한 모든 원망, 분노, 거기에 아주 뿌리치지 못하는 사랑과 고마움이 다 가라앉고 서로 다음 생에 만난 것처럼 가벼워서 좋았다. 


어린애 같아진 엄마를 모시고 다닐 때마다 다음 생에서 내가 엄마로 엄마가 내 아이로 사는 것 같아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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