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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행복코치 Nov 24. 2016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과 허기

나는 늘 목말랐다...

창원 근무 시절, 아주 뛰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쳐지지도 않는 사원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출근하면 하루 종일 세탁기를 쳐다보고 퇴근하면 세탁기를 만드는 사람들과 어울리고, 또 세탁기 이야기를 하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냈다. 주변의 모든 이들이 그렇게 보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어딘지 모르게 허전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맞는 것일까? 나의 푸른 청춘 20대를 이렇게 창원 공장 구석에서 보내는 것이 바라는 삶이었던가..


매주 부산 집에 갈 때마다 친구들을 만나고, 기타를 가져와서 쳐보기도 하고 피아노를 배워보기도 하고, 볼링클럽에 가입해서 볼링을 쳐보기도 했고, 아무도 모르게 비밀연애를 해보기도 했다. 입사한 지 2년 만에 큰 맘먹고 구입한 차를 휑하니 몰고 시골이었던 진해 한 구석의 카페를 찾아가기도 했다. 


허전함 그 넘이 내 속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때는 내가 왜 이럴까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마음 한 구석이 너무나 허전했었다. 허전함을 채울 수가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난 늘 허전하고 뭔가를 채우고 싶어 한다. 대학생이었을 때도 그랬고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창원에서도 그랬고, 어느 정도의 경력을 쌓았다고 할 수 있는 지금도 그렇다. 늘 무언가를 찾고 있고, 무언가 새로운 것을 기웃거리고 또 시도한다. 그런 이유로 산악회에 가입해서 전국 각지의 산을 헤맸고, 30대 친목모임 사람들과 여행을 다니고 코칭을 배우고, 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혼자서 훌쩍 해외여행을 떠나기도 했고, 어떤 날은 연극을 보러 대학로로 향하기도 했다. 결혼을 한 지금도 역시 남편은 나 몰라라, 역마살이 도지는 양 혼자서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고, 해외출장을 밥먹듯이 다니고 있다. 그리고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으면 눈을 반짝거리면서 빠져든다. 


어느 날 눈물 한 방울이...


회사에서 울었던 적은 셀 수도 없이 많지만 그중에도 몇 건이 기억에 남는다.

세탁기 설계실에서 실험을 할 때였다. 그날도 아침부터 세탁기 성능시험을 위해 오염포를 시험포에 붙이고, 어떻게 하면 성능이 더 좋게 나올 수 있을지를 검토하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세탁기 성능시험은 마치 화학 실습 같다. 지금은 바뀌었을 수도 있다.


일반 세제를 쓰면 세제의 성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니 세탁세제를 화학약품으로 조제를 해서 썼고, 오염포는 과거에는 만들어서 쓰다가 균일한 오염 조제가 되지 않아 일본 제품을 수입해서 썼다. 실험 준비를 위해 많은 오염포가 필요했는데, 통관 등등을 고려하지 않았다가 실험이 연기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먼저 준비해야 하는 건 화학세제와 오염포, 모형 옷이다. 일정 규격으로 제작된 모형 옷에 오염포를 부착하고 시험용 세탁기로 세탁을 한 다음 오염포를 떼어내서 말린 후 오염 제거 정도를 측정한다 이게 한 번의 실험 횟수다. 이 걸 세탁기 5대 이상 10회 정도를 했던가, 총 50번의 세탁기를 돌려야 한다. 한 번 세탁마다 1시간, 준비시간을 잡으면 총 1주일은 세탁기와 씨름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하다 보면 요령이 생긴다고, 세탁기의 뚜껑 반을 제거하고(예전 통돌이 세탁기는 반으로 접히는 뚜껑이었는데, 뚜껑 전체를 제거하면 안전장치 때문에 세탁기가 돌아가지 않는다.) 호수로 물을 집어넣고 빠른 시간 내 물을 채워서 돌리면 20% 정도 시간 절약이 돤다.


세탁기 설계실에 입사하면 모든 사원들의 첫 임무는 빨래하기다. 누군가는 실험실에서 세탁기를 돌려야 했기에 그 일은 말단 사원이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몇몇이 붙어서 함께 하기도 했고, 개발모델이 집중되는 시기에는 매일 아침마다 실험실 자리싸움이 났고, 직급고하를 불문하고 모두 빨래에 매달렸다. 한 과장님은 이런 말을 하며 웃기기도 했다.


 "울 아들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아빠로 알고 있는데, 회사에서 빨래만 하는 거 알면 울 건데.."


그렇게 실험을 하는 와중에 목이 말라 잠시 여사원 휴게실에 들어갔다. 물 한 잔을 마시고 잠시 앉았는데 갑자기 눈물이 툭 떨어지는 거다. 그러다 갑자기 터져 나오는 울음.. 눈물이 멈춰지지를 않았다.


'내가 지금 뭐 하러 여기 이렇게 있는 걸까? 지금 이 상황이 내가 바라는 삶인가. 이 생활이 내가 바라는 생활인가. 여기 이 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시간 때우기 인가…' 등등.


당시는 대학을 졸업한 여성이 막 사회진출을 시작할 때였다. 대부분의 부모는 딸이 좋은 회사 다니다가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주변의 많은 동기들이 선을 보고 결혼을 하고 회사를 떠났다. 


어쨌든 많은 것을 할 수는 없는 시기였다. 그런 와중에 회사를 다녔으니 선택받은 사람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뭔가 모를 허전함이 늘 잠재해 있었다. 우연히 기숙사 방에 혼자 있게 되면 일기장을 꺼내놓고 긴 글을 쓰기도 했고, 혼자만의 다짐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고 한두 명 있는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해도 그들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명확한 답변은 없었다.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눈물 한 방울의 경고


얼마나 울고 있었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오후 내도록 휴게실에 앉아서 울고 있었을 뿐이다. 몇 시간을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당시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칼퇴근을 하고 기숙사로 돌아온 기억만 있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지. 그리고 그 결과로 내가 무엇을 얻었는지는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그랬을 뿐이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알 수 없는 그런 시간의 연속이 너무 답답했다. 기숙사와 회사를 시계추처럼 오가는 이런 삶을 계속 살아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암울했다. 


그때의 그 눈물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경고를 한 것이 아닌가 싶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라고. 그때가 바로 무언 지는 모르겠으나 "지금과는 다른 변화가 필요함"이라는 말이 내 가슴과 의식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마치 판사가 땅땅 의사봉을 내려치며 판결을 하듯이 말이다. 아마도 그래서 서울 근무라는 기회가 왔을 때 별 다른 고민 없이 승낙을 하지 않았을까.


이야기를 하겠지만 서울생활을 하지 않았다면 내 삶이 어떤 방향으로 나갔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부산이나 창원에서 평범한, 대부분의 여성이 보내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물론 지금의 삶도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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