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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행복코치 Feb 15. 2017

좋아서 깨춤 추면서 온 서울이었으나..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던 서울 적응기

1996년 1월 2일, 28세.. 


서울 근무를 시작하는 첫날, 바로 그날부터 힘든 서울 생활이 펼쳐졌다.


집을 구할 수가 없어서 사촌동생 집에서 한 달을 머물기로 했다. 사촌동생은 신림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는데, 그  집에서 버스를 타는 곳까지는 약간의 고바위 같은 골목을 지나야 했다. 2005년 1월 그때 서울은 눈으로 하얗게 뒤덮여 있었다. 평생 동안 눈이라고는 열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만 봐왔으니 눈밭을 걸어봤겠나. 그것도 꽁꽁 얼어서 빙판이 된 비스듬한 골목길을. 하이힐과 정장을 입을 채로 엉금엉금 기면서 출근을 했다.

출근해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들 세련된 서울 말씨를 쓰는 깍쟁이 같은 사람들이었다. 멀뚱멀뚱 쳐다보는 사람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왔을지 궁금해하면서 다가오는 사람들. 하지만 내성적인 내가 잘 다가가지 않으니 쉽게 친해질 수 없었다.  


스스로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없다. 그때 근무했던 팀이 그랬다. 여성인재개발이라는 일이 무엇인지 무엇을 통해 여성만을 특화시켜 개발을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방안을 만들어 내야 했다. 그럴수록 마음속에는 능력이 있다면 남성이든 여성이든 무슨 상관이냐 하는 반감만 생겼다. 그 생각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인사 전문가가 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직장이든 어디든 성별과 상관없이 책임감 있게, 체계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은 각광을 받기 마련이다. 물론 남성과 여성의 태생적인 차이는 인정을 해야만 하지만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날 만큼 크게 작용하지는 않는다. 


이 팀에서 근무하면서 겪었던 어려운 일들은 지금도 생생하다. 


프로젝트 기간에 몇 번 보았을 때와 실제로 함께 일을 하면서 겪은 팀장은 완전 딴 사람 같았다. 너무나 힘든 사람이었다. 뭔가 핀트가 맞지 않았고, 뭔가 자꾸 어긋나기만 했다. 여사원들로만 구성된 팀이었지만 화기애애하기보다는 모두 힘들어했고, 얼굴이 굳어 있었다.


며칠 늦은 한 밤에 퇴근하면서 준비한 워크숍 진행 계획을 한 순간에 모든 참석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냉소를 날리며 뒤엎어 버리던 팀장의 얼굴은 지금도 생생하다. 일찍 퇴근하면서 다음날 결혼을 하는 팀원에게 모든 내용을 수정하라는 지시를 해 모든 팀원이 남아서 도와주는 일도 있었다. 물론 신부는 그다음 날 야근하면서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신랑 곁에 서 있어야 했다. 


지금까지 일하던 방식과는 많이 다른 조직에서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정작 힘든 것은 사람들이었다. 각 지역마다 자신이 살던 지역 사람들이 가장 좋다고 한다. 그건 그런 문화와 양식에서 성장을 했기에 익숙하기에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처음 몇 개월 동안 서울 사람들의 사람 대하는 법, 회식하는 문화 등을 배우고 익히는 게 쉽지 않았다. 어떤 것이 옳다 그르다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달랐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다. 


우선 회식문화를 보자면 창원의 조금은 흥청망청하는 회식문화에 비해서 이 곳은 내일의 삶을 위해서 오늘의 회식은 자제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리고 회식 이후의 모습도 많이 달랐다. 창원에서는 회식 이후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남사원들이 여사원을 챙겨서 안전하게 귀가하는 것을 챙겨줬다. 가끔은 집까지 데려다주는기도 했지만 적어도 각자 집으로 가는 차는 잘 탔는지 정도는 살펴줬다. 그런데 서울은 그렇지 않았다. 요즘 유행하는 각자도생이었다. 회식이 끝나자마자, "즐거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한마디로 모두 유령처럼 휙 사라졌다. 그렇게 사라지기만 하면 다행이다. 어떤 이는 네가 더 멀리 가니 나를 어디까지 태워달라. 물론 택시비는 나보고 내라고 했다. 이것이 보통의 모습이었는지 아니면 내가 속했던 조직 일부의 사람들이 그랬기 때문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창원에서 느낀 그런 끈끈함을 서울에서는 찾기가 어려웠다는 점이다. 

그렇게 난 서서히 서울 생활에 적응해갔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조직의 곳곳에 숨어 있는 선배들의 비호를 받으면서 말이다. 한 선배는 나를 보자마자 불러 앉혀놓고 찐한 경상도 사투리로 "니 서울서 살아남을먼 사투리부터 고치라."고 했다. 물론 그 말을 들은 기고만장했던 나는 겉으로는 "네, 그래에.. 고치야 하나부지예.. 해보께요." 했지만 속으로는 '사투리까지 고치면서 살아야 하나… 시시껄렁하다..' 그랬었다. 시간이 지나서야 그 선배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어떤 마음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늘 깨달음은 늦게 온다. 조금만 일찍 알게 해주면 어디가 덧날까..?  


그렇게 하루하루 견디다 보니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팀은 해체가 되었다. 팀원은 각 부서로 흩어졌고, 팀장은 팀원으로 강등되어 있다가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 결혼과 함께 퇴직을 했다. 새로운 팀에 배치가 되고 나서야 본격적인 인사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대리지만 인사에 대해서는 기본지식도 없는 상태로 맡게 된 업무는 복리후생제도 담당이었다. 전사의 주택임대자금을 관리하고, 임금협상을 위해 복리후생제도를 새로 기안하고, LG전자의 전사 포상제도를 개선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200억의 주택임대자금을 각 공장으로 배분하고, 출장제도를 변경하고 문의에 대해 회신하고, 포상제도 진행을 위한 기안서를 몇 번을 반려당하고. 가끔은 과장님을 따라 노조 사무실에도 갔고 이런저런 협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1년 가까이 시간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저만치 흘러 있었다. 


또 1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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