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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백마호와 토우

by 적진


오랜 푸른숲 조합의 용병 생활을 청산하고 우주 화물선 파일럿이 된 합성인간 케이.

그의 낡은 함선 '백마호'는 라 행성의 영주인 유신 백작의 의뢰를 받고 있었다. 200년간의 의무 복무를 마친 케이에게 유신은 단순한 고객이 아니라, 생사를 함께 나눈 전우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내 오랜 친구가 직접 오다니, 감격스러운데."

"유신 백작님께서 불러주시면 언제나 환영이지요." 케이는 웃으며 유신 백작에게 인사했다.

호화로운 라 행성의 저택에 들어서자, 유신 백작이 활짝 웃으며 케이를 맞았다. 그의 뒤로는 유신의 친위대인 백호청룡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백호는 강인한 체격의 군인이었고, 옆구리에는 총신이 길고 화려한 장식이 달린 라이플이 매달려 있었다. 청룡은 늘 차분한 표정으로 유신을 보좌하는 책사였다.

"이번 임무는 단순한 운송이 아니야. 옆 '가리' 자치령에 시찰 중인 제국 감찰사 시크미에게 선물을 전달해야 하네."

유신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건넨 홀로그램 태블릿에는 매혹적인 모습의 인어처럼 생긴 아인 여인의 초상이 떠올랐다.

큰 눈을 가진 그녀는 라 행성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아인 종족 중에서도 보기 드문 미녀였다. 케이는 뇌물이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에 잠시 당황했지만, 유신의 의뢰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유신과 그의 친위대가 케이의 함선 '백마호'에 올랐다. 함선은 낡았지만, 기체 표면의 푸른빛 태양광 패널 돛은 여전히 영롱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유신이 (함선 내부를 둘러보며) "이걸 구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여전하군, 백마호."

백호가 유신의 말에 "백작님, 저 함선은 라이온급 구축함 중에서도 가장 빠른 연락선이었습니다. 제가 알기론 속도와 기동력만은 최신 함선에 뒤처지지 않습니다."

청룡도 말을 이어갔다. "게다가 연속 단거리 워프와 스텔스 기능, 암호통신 해석 능력까지 갖추고 있지요. 전역 용병이 이런 기함을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유신은 탐스러운 눈으로 백마호를 바라보며 케이에게 물었다. "자네의 이 '백마호'는 볼 때마다 감탄스럽군. 대체 언제부터 함께한 건가? 자네의 과거에 대해선 한 번도 제대로 들은 적이 없어서 말이야."

케이는 조종간을 조작하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비밀입니다, 백작님. 오히려 그때는 기억하십니까? 조합에서 일할 때 처음 백작님을 보았던 때 말입니다.

불타는 토우에서 백작님을 구출했던 날 말입니다."

그의 질문에 유신은 잠시 표정이 굳었다가, 이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아, 그때 말인가? 사제단 '케이티'와 헤어진 후였지. 한동안 방황하다가 그만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내 토우를 부숴버렸었네."

케이의 눈이 놀람으로 커졌다.

토우는 인간형 기동 작업 로봇으로, 사람이 직접 탑승해 조종하는 병기이자 중장비였다. 4m 높이의 거대한 이 로봇은 우주, 지상, 심지어 해저까지 활동이 가능했고, 플라즈마 라이플, 미사일, 그리고 날파리처럼 무리를 지어 적을 공격하거나 방어막을 형성하는 나노 머신 실드까지 갖추고 있었다. 작업용은 광물 채굴이나 물건 이송에 쓰였지만, 전쟁용은 함대나 도시와 같은 거점을 점령하는 데 사용되는 핵심 병기였다.

특히 귀족이 소유한 토우는 값비싼 장식과 중장갑으로 치장되어 있었고, 핵융합 발전 엔진인 고출력 크리스탈을 탑재하고 있어 그 가치는 일반 함선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유신이 그런 값비싼 병기를 감정 때문에 부숴버렸다는 사실에 케이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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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 행성

거만하고 오만한 표정의 감찰사 시크미가 아인 미녀를 마주했다. 그의 눈빛은 뇌물을 탐하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리 행성 대대로 공작은 황족이지만 감찰사 시크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자치령의 귀족은 왕이었다. 제국은 귀족들의 300여 개의 자치령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밑으로 몇 개의 행성계를 소유하고 있었다. 가리 행성은 가리 자치령의 수도 행성으로, 20개가 넘는 식민 행성을 거느린 거대 자치령이었다. 그러나 그런 대대로 공작도 시크미의 무례함을 참고 있었다.

시크미는 유신 백작을 무시하는 표정으로

"이런 하찮은 아인으로 나를 매수하려 하다니, 유신 백작의 안목이 이 정도였나?"

시크미의 모욕적인 언행에 유신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그가 라이플에 손을 올리는 순간, 케이가 앞으로 나서며 시크미에게 허리를 숙였다.

"감찰사님, 이 아인 미녀는 단순한 뇌물이 아닙니다. 백작님께서 평소 인어 같은 아인들에게 큰 관심이 있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생명체를 감찰사님께 보내는 것은, 감찰사님의 생명 다양성 보존 사업에 크게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케이는 시크미의 자존심을 교묘하게 건드리면서도, 진심으로 그를 존경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시크미는 처음에는 비웃었지만, 케이의 아부성 말에 점차 표정이 누그러졌다.

케이는 시크미가 추진하고 있는 행사와 기부 활동 등에 감동받았고 큰 기부를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자

시크미는 태도를 바꾸었다.

"이런 귀한 아인을 보존할 수 있게 해주어, 라 행성의 생물 다양성 보전 노력에 깊이 감명받았소."

시크미는 위선적인 미소를 지으며 아인 미녀를 자신의 함선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시크미의 함선 외벽에는 '유전자 조작 아인 구조', '생물 다양성 보전' 등의 구호가 화려하게 그려져 있었지만, 케이는 그의 함선이 실제로는 은하계의 희귀한 생명체를 밀거래하는 인신매매 조직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제국은 노예를 인정하지만, 거래를 금지하고 있었기에 시크미의 행위는 명백한 불법이었다.

유전자 조작 기술로 인간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제국에서는 각 행성과 귀족의 성향에 따라 도덕 기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대부분의 행성이 중세 수준의 삶을 영위하는 가운데, 시크미와 같은 인물은 법의 허점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었다.

"좋아. 유신 백작에게 전해. 이번 자선활동에 감동받았다고."

아인을 시크미의 함선에 다 싣고 나자 시크미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무사히 임무를 마친 케이는 유신을 데리고 백마호로 돌아갔다.

백마호의 로비에는 유신이 백호와 청룡을 거느리고 앉아있었다.

"자네의 임기응변 덕에 큰일 날 뻔했네. 하지만 진심으로 죽여버리고 싶었군."

유신의 말에 케이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그게 바로 저희 합성인간이 200년 동안 배우는 생존의 기술입니다. 백작님."

두 사람은 다시 라 행성을 향해 우주를 가로질렀다.

거대한 우주를 여행하는 백마호 속에서, 케이는 자신이 속한 제국의 웅장함 뒤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실에 대해 막연한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의문은 곧 그의 잊혀진 과거와 맞닿아 있음을 아직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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