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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마왕의 영지, 라 행성으로 가는길

by 적진


3화: 마왕의 영지, 라 행성으로 가는 길

까마귀호는 라 행성을 향해 순항했다. 대부분의 함선이 그러하듯, 까마귀호 역시 기본 프레임에 크리스털 발전기와 추진진 엔진이 부착된 형태였다. 하지만 백마호 같은 거함에 비하면 훨씬 소박했고, 불필요한 장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크리스털출력으로 추진 엔진에 막대한 전력으로 공급해서 이온 추진엔진 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 진동이 함선 전체를 가로질러 느껴졌다.

케이는 함선 곳곳을 둘러보며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낡은 복도와 투박한 격벽을 지나 마침내 격납고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어이, 복돌이! 여기까지 좌천당했냐?"

해병대 중위 진호가 거친 목소리로 케이를 불렀다. 진호의 눈에는 노골적인 적대감이 서려 있었다. '복돌이'는 복제인간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케이는 아무 말 없이 진호를 바라보았다. 격납고는 해병대 소속의 강화복 '토우'들이 줄지어 도열해 있는 모습이었다. 투박하지만 강력해 보이는 회색빛 토우들은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우리 같은 진짜 인간들은 죽으면 끝이야! 너희 복제인간들은 백마호 부활 시스템인가 뭔가로 다시 살아날 수 있다며? 방패 3호에 타고 있던 우리 동료들은 다 죽었어! 다 너희 같은 복제인간 때문에 죽은 거라고!"

진호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케이에게 달려들었다. 케이는 진호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뒤, 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강하게 잡아 넘어뜨렸다. 진호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뒤로 거대한 토우들이 무표정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방패 3호의 함장은 K-1236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합성인간이었지만, 부활 시스템은 없었다." 케이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나 역시 가족을 희생했다."

케이 뒤로 진호 중위의 욕지거리가 들려왔다.

"아씨~ 나도 강화인간이라도 돼야 하나."

케이는 더 이상 진호를 상대하지 않고 몸을 돌려 화물창고로 향했다. 창고 문이 열리자마자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화물 모듈로만 이루어진 까마귀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창고에는 온갖 생체 조직 샘플들이 가득 찬 투명한 통들이 즐비했고, 부패한 냄새가 진동했다. 거대한 컨테이너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고, 그 사이를 비추는 희미한 조명 아래서는 기괴한 형태의 생체 물질들이 육안으로도 식별 가능했다. 그때, 창고장 오영우가 케이에게 다가왔다.

까마귀호는 워프 항해의 굉음을 뒤로하고 차분한 정적 속에서 우주를 미끄러져 나갔다. 30분 후면 라 행성 모성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케이는 화물창고를 떠나 함교로 돌아왔다. 좁은 통로를 지나는 동안, 그는 방금 전 오영우 창고장과의 대화를 되짚었다.

"이건 푸른숲 조합에서 유신 백작님께 보내는 물건들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정기적으로 배달하게 될 겁니다."

오영우 창고장은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생체 조직 샘플들이 가득한 컨테이너를 가리키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유신 백작. '마왕'이라 불릴 정도로 아인(亞人)에 대한 관대한 정책을 펼치는 인물. 제국이 AI나 아인종에게 멸시와 증오의 시선을 보내는 것과 달리, 유신 백작의 영지는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기괴한 아인들, 로봇, AI, 합성인간 등 다양한 생명체들이 뒤섞여 살아가는 곳이었다.

케이는 그들의 존재 자체가 제국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까마귀호는 연락선으로 활용되지만, 사실상 이런 '특수 화물' 운송이 주된 임무였다.

무장으로는 플라즈마포 3문과 유도 미사일 2세트가 함선 측면에 자리하고 있었고, 방어용 나노 실드 2세트가 함체를 보호하고 있었다. 승무원 100명이라는 숫자는 이 작은 함선에 비해 다소 많아 보였지만, 1개 소대(8-10명)로 구성된 해병대와 전투 및 화물 파일럿 소대가 함께 탑승하고 있었기에 그리 많다고 볼 수만도 없었다.

까마귀호는 단거리 워프가 가능하여 제국의 감시망을 피해 빠르게 이동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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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 백작 취미도 고약하군." 케이는 창고를 나와 함교로 돌아갔다.

함교에 들어서자, 낡은 장비들이 내는 미세한 기계음과 함께 희미한 빛이 그를 맞았다. 백마호의 최첨단 장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지만, 케이에게는 오히려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었다.

케이는 잠시 눈을 감고 진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진호의 분노는 단순한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이 복제인간과 아인종에게 드리운 차별의 그림자이자, 사라져간 수많은 생명들의 절규였다.

그는 진호의 주먹이 자신을 향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 주먹에는 방패 3호에서 죽어간 동료들에 대한 슬픔과, 자신들만이 부활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진호의 얼굴에서 단순한 증오를 넘어선 복잡한 감정들을 읽었다. 어쩌면 진호 역시 이 라 행성의 주민들과 다를 바 없는, 제국의 시스템 속에서 고통받는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케이의 머릿속을 스쳤다.

함교에는 오직 두 명의 크루가 있었다. 한 명은 단발머리의 젊은 여성 항해사, 다른 한 명은 나이 지긋한 통신병이었다.

항해사 '리엘'은 함선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제국군 소속이 아닌, 푸른숲 조합에서 파견된 민간인이었다. 케이가 들어서자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인사했다.

"함장님, 복귀하셨군요. 워프 해제까지 27분 남았습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불필요한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맡은 임무에 충실한 듯했다. 케이와 리엘의 관계는 철저히 공적인 영역에 머물렀다. 그는 그녀의 임무 수행 능력을 신뢰했고, 그녀는 그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랐다. 둘 사이에 감정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그것이 이 낡은 함선을 움직이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면, 통신병 '젠'은 함교 한쪽 구석에서 개인 단말기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젠은 텁수룩한 수염과 늘 피곤에 절어 보이는 눈을 가진 중년 남성이었다. 그는 케이에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고, 꼭 필요한 보고만 간결하게 했다.

그는 케이의 과거나 '복돌이'라는 비하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제국의 복제인간 정책에 대해 미묘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케이는 그가 과거에 아인종이나 AI와 관련된 좋지 않은 일을 겪었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굳이 묻지 않았다.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 이 작은 함선에서 공존하는 방식이었다.

라 행성. 우주 지도상에서는 작은 점에 불과했지만, 그곳은 독특한 생명체들과 사회를 품고 있는 별이었다.

대부분의 행성이 거대한 우주정거장에 함선을 정박하고 셔틀을 통해 지상으로 내려가거나 우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우주 엘리베이터는 부유한 행성의 지표가 되기도 했지만, 라 행성에는 그런 거창한 시설은 없었다. 대신, 우주정거장에 정박한 까마귀호에서 셔틀로 행성 대기권으로 진입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라 행성이 제국의 엄격한 통제에서 벗어나,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케이는 함교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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