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견 임시보호 15일 차
임보 2주 차에 접어들며 드디어 라이스가 나와 남편에게 관심을 갖고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있으면 슬쩍 와서 발가락 냄새를 맡거나 뭉툭한 코로 무릎이나 종아리를 쿡 찔러보았다. 물론 조금 움직이거나 손을 뻗으면 다가온 속도의 2배 정도 빠르게 도망갔지만. 라이스는 이제 우리와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는 걸 인지한 걸까, 혹은 체념한 걸까.
어쩌다 보니 거실의 놀이매트 한가운데가 라이스가 배변을 하는 자리가 되었다. 배변 패드를 갈아주기 위해 쪼그려 앉으면 맨살이 나온 바지와 셔츠 사이의 등에 촉촉한 무언가가 닿았다. 뒤로 슬쩍 다가온 라이스의 코였다. 그럴 때 라이스는 내가 어떤 반응을 해도 놀라기 때문에 간지러워도 참고 모른 척했다. 마음 속으론 '오구오구 잘한다.'를 외치며.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낮에는 주로 나, 무늬, 라이스가 집에 있었다. 대개 무늬는 내가 있는 곳에 머물렀다. 거실에 있다가 서재방으로 가면 쓰윽하고 들어와 서재방에 놓아둔 자기 침대나 러그, 소파 중 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내가 움직일 때마다 졸졸 따라오는 건 아니고 꼭 30초에서 1분 정도 지나면 토도도 하고 무늬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어김없이 내가 있는 곳에 빼꼼하고 고개를 내밀어 쳐다보는 무늬. ‘실례합니다. 들어가도 될까요?’라고 말하는 듯하다. 나는 안다. 조용히 날 따라다니는 게 무뚝뚝한 무늬의 최고의 애정표현이자 보호자 곁에서 안정을 찾는 것이라는 걸.
거실에 머물게 된 라이스는 위험할지 몰라 막아놓은 주방 공간을 제외하고는 어디든 올 수 있지만 오로지 거실에만 있을 뿐 좀처럼 방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약속한 듯 마치 한 몸처럼 움직이는 나와 무늬가 안 보일 때면 라이스는 바빠졌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 매분 매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서재방에 있으면 방 문 앞에 와서 물끄러미 쳐다봤다. 안방에서 쉴 때면 침대 위를 올려다보고 갔다가 다시 와서 보기를 반복했다. 몇 번 반복하다 안심이 되면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쉬었다. 좋아하면서 안 좋아하는 척 하지만 허술해서 다 들키고 마는 짝사랑남 같았다. 라이스가 한참 쳐다보고 있어도 모르고 있다가, 무늬를 향해 작게 ‘히웅히웅’ 하고 우는 소리를 내면 그제야 알아차리기도 했다. ‘라이스 왜?’라고 말하면 ‘아아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전 이만!’이라면 후다닥 부리나케 달려가 자기가 머물던 자리로 돌아갔다. 놀라는 건 안쓰러웠지만 동그래진 눈과 마음처럼 빨리 움직여지지 않는 짧은 다리, 허둥지둥 거리는 엉덩이가 너무 귀여운 짝사랑 남이었다. 이것도 언젠가는 다 추억이 되어 ‘몰래 쳐다보다 들켜서 허둥대는 라이스’를 밈처럼 따라 하고 즐거워하게 될 날이 올 거라 믿었다.
낮에 집을 비우는 남편과는 좀 더 어색한 사이였는데, 그럼에도 어느덧 남편마저도 조금씩 관찰하기 시작한 불꽃 짝사랑남 라이스. 옷방에서 옷을 갈아입는 남편의 뒷모습을 문 앞에서 몰래 지켜보고 있거나 살짝 다가가기도 했다. 물론 그러다 낌새를 차린 남편이 뒤를 돌아봐 눈이 마주치면 못 볼 거라도 본 듯 ‘엄마야!’를 외치는 듯한 표정으로 허둥지둥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이렇게 우리를 관찰하기 시작한 건 방치된 공간에서 오로지 개들끼리 서로 기대어 살았기에 사람이 낯선 수밖에 없는 라이스가 우리를 통해 사람의 말과 행동양식에 관심을 가졌다는 신호 아닐까. 사실 확신이 생기진 않았다. 이런 상황은 책에서도, 유튜브에서도 본 적이 없다. 반려견 무늬를 돌보기 위해 공부했던 것에서도 딱히 적용할만한 게 없었다.
라이스를 대하며 학교에서 일할 때 조급함을 물리치려 마인드 컨트롤을 위한 주문이 생각났다. ‘나는 배우는 사람 곁을 지키고, 적절한 때에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학생들이 조금 오래 걸려도 괜찮으니 우선은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며, 급해지려는 마음을 다그쳤다. 나는 이미 해본 거니까, 나는 더 오래 살았으니 쉽고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는 아이들은 모르는 게 당연하다. 라이스도 그럴 것이다. 라이스가 살던 곳과 임보처인 우리 집은 공통점이라 할 만한 게 하나도 없다. 그나마 외양간에서 어울려 살던 개친구를 닮은 무늬가 있는 것 정도랄까.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심한 악취와 오물, 벌레가 들끓던 그곳보다는 100배 1000배 안전해진 건 맞지만, 라이스의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살던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황당하고 낯선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운 순간은 고민에 고민 끝에 길을 찾은 듯 불현듯 반짝하고 빛나는 눈빛이 된 학생의 옆얼굴을 바라볼 때였다. 그 모습을 보며 내가 하는 일과 다시 단단히 사랑에 빠졌었다. 뭔가 어설프지만 라이스도 길을 찾으려 애쓰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을 주자. 오래 기다리자. 조급해하지 말자. 옆에 앉혀놓고 이렇게 하는 거라고 모범답안을 읋어주지 말자. 어느덧 라이스의 옆얼굴이 낯선 문제 앞에서 신중하고 깊이 고민하던 학생들의 그것과 닮아 보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나의 어설픈 짝사랑남 라이스의 마음을 모른 척하며 조금 더 기다려 줘야겠다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