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1일. 직장인 남편, 프리랜서 아내, 유기견 출신 반려견 무늬(4살, 여아)가 사는 집에 임시보호(이하 임보) 하숙견이 왔습니다. 임보견의 이름은 라이스. 라이스는 동물구조단체 위액트가 구조한 개로, 경북 문경의 한 방치된 외양간에서 썩은 사료와 고인 물로 연명하며 자가번식한 50여 마리의 개 중 하나. 발목까지 오물이 차오르던 처참한 환경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강인한 아이지만, 살아온 날들이 지옥 같았던 탓에 주위 경계가 심하고 특히 사람이 낯설고 두려워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과연 라이스는 다시 한번 우리 인간에게 기회를 줄까요? 라이스와 저희 가족이 함께 보듬으며 노력해 온 소중할 날들을 아로새기기 위해 기록합니다.
라이스를 임시보호 하고 보니 3주 뒤가 설 연휴였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 직장을 다니지 않고나서부터는 연휴의 가치가 많이 떨어져서 그런지 미리 체크하지 않은 것이다. 직장인인 남편은 이미 연휴 기간을 인지하고 있어서 라이스를 데려올 때부터 설에 부모님 댁에 갈 때 라이스를 데려갈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한다. 시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조금 멀어서 차로 편도 5시간 정도 걸리는 곳이다. 명절 연휴가 짧아 비슷한 시간에 귀성 차량이 몰리게 돼서 6시간 넘게 걸린 적도 있었다. 무늬는 차멀미를 하지 않는 아이고 차 타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너무 오랫동안 카시트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면 다리에 좋을 리 없고, 무엇보다 너무 지겨워 보여서 안쓰러웠다. 그래서 아예 전날 출발해서 중간쯤에서 1박을 하거나 막히는 시간을 피하기 위해 밤 11, 12시나 새벽에 출발해서 시가에 도착하면 한숨 자는 일정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임시보호 3주 차인 라이스는 장거리를 여행하기엔 여러 가지로 무리인 듯했다. 켄넬에서는 나왔지만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누워서 안정을 취했고, 모두 잠든 밤이 되어서야 집안을 탐색하며 집이 무엇인지 알아가는 중이었다. 우리의 손길을 낯설어하고 있어서 집에서 라이스를 돌보는 것조차 어려움이 있었다. 산책은커녕 현관문 밖으로 나간 적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동차를 타는 연습을 할 새도 없었다. 남편과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아직 라이스의 안전을 완벽히 지켜줄 수 없다는 결론에 닿았다. 시부모님께서는 가끔 병원 진료나 모임 참석으로 서울에 오시기도 하기에, 혹 명절 전에 볼일이 있지 않으실까 체크도 해봤지만 당분간은 일정이 없으시다고 했다. 할 수 없이 이번에는 남편만 움직이고 나와 무늬, 그리고 라이스는 집에 있기로 했다. 자주 못 봬서 아쉽기도 했지만, 남편과 이야기를 마치고 돌아서는 순간 살짝 웃음이 나왔다. 남편은 못 봤겠지?
라이스야 무늬야 이렇게 얌전하게 있어줄거지?
명절을 피하기 위한 며느리와 딸의 치밀한 설계라고 생각하시면 안 되는데. 각자의 부모님께 라이스의 임시보호와 현재 라이스의 상태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 부득이 이번 명절 때 뵈러 갈 수 없음을 설명하기로 했다. 우선 우리 집은, 라이스를 데려오기 전 가졌던 가족 송년회에서 라이스의 임시보호를 알렸기에 이미 알고 계셨다. 더욱이 엄마와는 용건이 없어도 보통 사나흘에 한 번씩 통화하고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받아서 라이스의 적응 정도를 이미 알고 계셨다. 그래서 엄마와 아빠에겐 상황을 말씀드리기 수월했다. 다 함께 못 보는 건 아쉽지만 가까이 살고 계시기도 해서 라이스도 만날 겸 겸사겸사 명절 지나 우리 집에 다니러 오시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시가 부모님께는 남편이 설명드렸다. 늘 우리 부부의 의사를 존중해 주시는 분들이라 흔쾌히 이해해 주실 거라 믿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서운해 하시진 않으셨나 물었다.
“아니. 오히려 잘한다고 칭찬해 주시던데?”
잘한다고? 잘~한다 이런 뉘앙스는 아니셨을 테고, 더욱이 칭찬은 무슨 의미인가 궁금했다. 그동안 우리 부부가 달이와 펠라처럼 입양을 앞둔 아이들을 잠시 돌봐주는 것 정도는 알고 계셨다. 달이와 펠라가 좋은 가족을 찾았을 때 함께 기뻐해주시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에도 임시 보호라는 단어는 아마 들렀어도 익숙하게 사용하는 게 아니라서 잊으셨을 듯했다. 그런데 이번에 남편이 라이스라는 아이를 잠시 맡아서 보고 있다고 했더니 어머니께서
“아, 임시 보호 그거 하고 있는 거니?”
라고 말씀하셨다는 거다. 비밀은 효리언니였다. 당시 TV에서 ‘캐나다 체크인’이 방영 중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눈물 콧물 쏟으며 챙겨보고 계시는 중이었다. 시부모님 또한 덕이라는 삽살개를 반려하고 계신 반려가족이라 그런지 힘든 상황에 놓였던 개가 가까스로 구조되어 바다 건너의 가족을 만나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고 계셨다. ‘그동안 너희가 했던 일을 이제야 좀 알았네. 참 좋은 일 하는구나.’라는 말씀과 함께 라이스 잘 돌봐서 좋은 가족 찾아주라고 당부해주셨다.
출처 : tvN <캐나다 체크인> 공식 홈페이지
그래봤자 1박 2일이었다. 남편은 부모님 댁에서 하룻밤만 자고 돌아오기로 했다. 하지만 결혼 최초로 설 연휴에 집에서 온전히 나와 강아지들만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는 건 내 나름의 큰 사건이었다. 남편을 배웅하고 나서 임시 보호를 하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싶어 한참 멍하니 앉아있었다. 물론 그리 평화롭지는 않았다. 남편 없이 실내에서 배변을 하지 않기에 하루 평균 2번, 많기는 4번까지 산책을 해야 하는 무늬와 뭐든 잘 놀라고 놀라면 온 집을 뛰어다니며 소변을 뿌리는 라이스를 돌보느라 하루가 금방 갔다. 저녁에는 남편에게 영상통화를 걸어 부모님께 라이스의 모습을 보여드렸다. 전화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리자 눈을 동그랗게 뜬 라이스를 보시며 “아가, 좋은 가족 찾으라.”라고 또 말씀해 주셨다. 우리 집에서는 라이스가 대표로 설 덕담을 들은 셈이 되었다. 당연히 올해 추석 때는 라이스도 평생 가족들 품에서 명절을 보내고 있을 거다. 우리와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명절, 나에게 특별한 설을 만들어준 라이스와 나만의 추억이 생겼다. 그리고 무늬와 라이스가 잠든 뒤 고요한 평화가 가득 찬 우리 집 거실 소파에 앉아 조용히 외쳐보았다. 슈퍼스타 이효리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