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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이 Jun 20. 2023

나와 임보견의 사이는 지하 10층에

구조견 임시보호 33일 차


이 글은 구조견 라이스를 임시 보호하며 끄적인 일기입니다.

2022년 12월 31일. 직장인 남편, 프리랜서 아내, 유기견 출신 반려견 무늬(4살, 여아)가 사는 집에 임시보호(이하 임보) 하숙견이 왔습니다. 임보견의 이름은 라이스. 라이스는 동물구조단체 위액트가 구조한 개로, 경북 문경의 한 방치된 외양간에서 썩은 사료와 고인 물로 연명하며 자가번식한 50여 마리의 개 중 하나. 발목까지 오물이 차오르던 처참한 환경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강인한 아이지만, 살아온 날들이 지옥 같았던 탓에 주위 경계가 심하고 특히 사람이 낯설고 두려워서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과연 라이스는 다시 한번 우리 인간에게 기회를 줄까요? 라이스와 저희 가족이 함께 보듬으며 노력해 온 소중할 날들을 아로새기기 위해 기록합니다.


라이스를 찾아보세요! (출처 : 위액트 인스타그램)


라이스와 함께 외양간에서 살던 아이들은 다들 닮았다. 얼굴 생김새와 모색, 체형 등의 특성으로 몇 개의 그룹을 만든 뒤 추정 나이를 고려하면 부모견과 동배 아이들을 대략 유추할 수 있었다. 제대로 된 밥그릇과 물그릇 하나 없던 곳이니 예방 접종이나 중성화 같은 의학적 돌봄은 외양간 아이들에겐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좁은 공간에 갇혀 무분별하게 일어난 교배로 자가 번식한 아이들의 개체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에 놀란 전 소유주는 자신이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무책임하게도 아이들을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환경에 오랫동안 방치했다. 함께 구조된 외양간아이들 중 비교적 어린 축에 속하는 라이스는 아마도 그 외양간에서 태어났을 거라 예상된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허름한 외양간의 검은 천장이 하늘이라 생각하고 살았을 아이는 이제 파란 하늘 아래서 따뜻한 햇살을 맞게 되었다. 금방 그렇게 될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라이스는 우리 집에 온 지 한 달이 되었지만, 아직 제대로 된 하늘을 보지 못했다. 한 번도 밖에 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조가 된 후 금세 넓어질 줄 알았던 라이스의 세상은 아주 조금 넓어져 우리 집이 되었다. 라이스가 사는 세상이 넓어지는 것과 라이스의 내적, 외적 성장이 비례 관계인 것 같았다. 펠라처럼 작은 아이였다면 슬링백에 넣어 품에 덥석 안고 나가서 벌름거리는 코에 신선한 겨울바람을 넣어줬을 텐데. 물론 라이스 정도의 아이도 힘을 좀 내면 안을 순 있지만, 아직 우리 사이엔 풀어야 할 숙제가 많았다. 안아 올리는 건 넉넉잡아 앞서 있는 10개 정도의 미션을 성공한 후에야 꿈꿔볼 만한 난이도의 미션이었다.

라이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아늑한 세상 밖에 발을 들이기를 늘 어려워했다. 외양간에서 구조될 때도 사람 손을 타려 하지 않아서 1차 아이들이 구조된 후 며칠 뒤 2차로 구조되었다. 우리 집에 와서도 켄넬에서 며칠 동안 나오지 않다가, 우연히 켄넬 문을 잘못 건드려서 난 소리에 놀라서 후다닥 나왔다. 잽싸게 켄넬을 닫아서 다시 못 들어가게 되었지만, 그 후 한동안은 서재방의 구석에만 머물렀다. 하지만 너무 서재방에만 머무는 게 좋을 것 같지 않아서 목욕을 한 후 그 틈을 타 라이스의 공간을 거실에 만들어줬다. 거실로 나온 뒤 라이스는 조금씩 더 적극적으로 변했다. 거실은 우리 집에서 가장 넓은 공간이고 각 방과 화장실로 모두 이동할 수 있는 곳이었다. 켄넬에서 서재방, 서재방에서 거실로. 공간을 넓혀간 라이스는 거실에서도 구석을 차지했다.

거실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 라이스


라이스가 거실로 나온 후 아무래도 우리는 더 자주 마주치게 되었다. 라이스는 거실 구석에 누워 동그란 눈을 굴리며 하루 종일 이방 저 방 옮겨 다니는 우리와 무늬를 관찰했다. 관찰은 라이스만 하는 게 아니었다. 나 역시 쳐다보는 것도 무서워하는 라이스를 놀라게 하지 않는 선에서 라이스가 자거나 밥을 먹을 때, 라이스의 모습을 몰래 훔쳐봤다. 감자 수제비를 닮은 귀와 뭉툭하고 두툼한 앞발, 풍성한 털이 뒤덮인 엉덩이와 꼬리라인을 그제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라이스와 함께 있으려고 서재방에서 하던 일을 거실로 들고 나와서 테이블에 앉아서 했다. 조금씩 가까워지며 거리를 좁혀가는 라이스를, 소리를 내면 놀랄 게 뻔하니 마음속으로 우렁차게 응원했다. 손으로 간식을 주면 아무리 먹고 싶어도 꾹 참고 외면했던 아이가 어느덧 손으로 주는 음식들을 아무거나 다 받아먹기 시작했다.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그런데...

위기도 있었다. 거실에 나와서 생활하면서부터 조금씩 목줄과 리쉬를 보여주고 몸에서 가장 예민하지 않은 등 쪽에 살짝 대 보기도 했다. 라이스는 신기한 냄새가 나는 물건에 관심을 보이며 킁킁거렸다. 그럼 잘했다고 하고 간식을 주어 리쉬와 목줄과 간식을 연결시켜 보려 했다. 조금 익숙해진 후부터는 목줄과 리쉬가 합쳐진 일체형 슬립리쉬로 꾸준히 연습했다. 리쉬를 바닥에 내려놓고 사이사이에 간식을 뒀다. 희대의 겁쟁이가 의심도 거부감도 없이 쏙쏙 잘 골라 먹는 걸 보고 어쩌면 생각보다 빠르게 목줄 하기를 성공할 수도 있겠다 낙관했다. 아니었다. 경기도 오산이었다. 슬립리쉬의 목줄 부분을 길게 늘인 뒤 간식을 이용해 라이스의 고개를 동그란 부분에 넣었다. 한쪽 팔을 조금 내렸더니 리쉬가 라이스의 목에 닿았다. 동. 공. 지. 진. 깜짝 놀란 라이스가 펄쩍펄쩍 뛰었다. 진정할 때까지 가만히 두었다. 내 심장도 라이스처럼 팔딱팔딱 뛰는 중이었다. 조금 뒤 라이스는 느슨한 리쉬를 목에 맨 채 가만히 있었으나 불안해 보였다. 조금 지나 리쉬를 조금 당겨보았다. 다시 펄쩍 뛰며 이번엔 리쉬를 물어뜯기 시작했다. 믿었는데 이게 뭐냐며 원망스러운 눈으로 나를 째려보는 라이스. 라이스의 행동에 반응하지 않으려 했지만 라이스는 나의 당혹감과 미안함을 눈치챘을 것 같다. 흥분한 라이스가 나의 손을 물려고 해서 그날은 리쉬를 풀어주지도 못했다.


새벽에 보니 리쉬의 목줄 부분이 느슨해서 라이스의 목에서 내려와 몸을 통과해 엉덩이 쪽으로 빠진 모양이었다. 허물처럼 벗겨진 리쉬를 챙겨서 선반에 올렸다. 구석에 놓아준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서 자던 라이스는 나를 보자 도넛처럼 몸을 말았다. 조금씩 신뢰를 쌓아가는 듯했던 나와 라이스의 사이는 다시 지하 10층쯤 되는 어두컴컴한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꾸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마 라이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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