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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이 Nov 22. 2023

교사에게도 교사가 필요해. 반면교사(反面敎師) 말고!

  이제는 정말 겨울이 왔다고 말해도 되지 싶어. 겨울이 되면 늘 나의 두 번째 근무지가 생각나. 그 학교는 행정구역 상 경기도에 있었지만 강원도와의 경계에 거의 맞닿아 있는 지역에 있었어. 큰 강을 끼고 있는 도시였는 데다 비도 눈도 흔하던, 사계절 내내 물기 가득한 곳이었지. 제법 오래된 학교였고 그 지역의 대표 학교 격이어서 소규모 대학의 캠퍼스로 봐도 될 만큼 교정이 넓었어. 본관과 별관, 특수동, 식당, 강당 같은 시설이 독립 건물로 되어 있는 것만 봐도 교정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선생님 중에는 이 지역에서 태어나 이 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이곳의 교사가 된 분도 제법 계셨어. 교문 관리실에 계신 경비 어르신은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곳에 근무하셨다는구나. 그분들을 보면 마치 건물 높이보다 더 높이 자란 화단의 고목처럼, 이곳에 곧은 뿌리를 내리고 계신 것 같았어. 


  난 특수동 건물에서 근무했어. 특수동은 4층 짜리 건물인데 1층에는 시청각실과 보건실, 2층부터 각 층에는 교과 특별실, 3층과 4층에는 자습실과 세미나실이 있었어. 희한하게 이 건물에 계신 선생님들은 다들 조용하게 일하는 분들이었지. 건물의 위치가 본관과 식당이 가장 멀기도 했고, 교사들도 조용해서 그런가, 어딘가 묘하게 학교 안 유배지 같았어. 그렇지만 그거 아니. 정약용은 귀양 갔던 강진에서 <목민심서>를 완성했고, 가사 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도 유배지였던 담양에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썼다지. 이 건물에 계신 선생님들과 한 해를 보내며 난 은둔 고수에게 사사하는 젊은 교사가 되었어.  


  1층의 보건실에는 대학생 딸과 고등학생 아들을 둔 보건 선생님이 계셨어. 당시 내가 25살 즈음이었으니까 거의 내 어머니 뻘 되시는 분이었어. 난 특별실에 혼자 근무하고 있어서, 아침에 출근해서 컴퓨터를 켜면서 전화를 드렸어. 


"선생님~ 출근 잘하셨어요?" 

"홍선생, 얼른 내려와." 


  전화를 끊으시면 곧바로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내리기 시작하셨어. 보건실에 가서 따뜻한 커피를 각자의 텀블러에 나눠 담고,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내 자리로 돌아가는 다정한 아침 일상이 좋았어. 선생님께서는 말로는 요즘 아이들은 조금만 아파도 보건실에 온다며 귀찮다고 하면서도, 6개씩 2줄로 포장된 타이레놀을 1알씩 떼어 내면 생기는 뾰족한 4개의 꼭짓점을 꼭 가위로 동그랗게 잘라서 아이들에게 건네는 분이셨어. 아침부터 비가 오면  혀를 끌끌 차며 깊숙이 넣어둔 목발을 넉넉히 꺼내 놓으셨어. 그런 날엔 인조잔디가 깔린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는 애 한둘이 발을 접질린다며. 퇴근할 때 보면 목발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던 경우가 많았지. 


  보건 선생님은 나만의 대나무숲, 혹은 위클래스 상담 선생님이셨어.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상의할 수 있었어. 내 편이 되어주시다가도 따끔하고 정곡을 찌르는 조언을 해주셨지. 비밀보장은 기본이라 선생님께 드린 말씀은 보건실 문 바깥을 나간 적이 없었어. 난 엄마 앞에서도 생전 울지 않는 편인데, 유독 선생님 앞에서는 울기도 많이 울었어. 말하다가 감정이 북받쳐 울음이 터지면 스스로 멈출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셨는데, 그때 만들어주시는 고요함이 어떤 위로의 말보다 컸어. 그때 교사도 학교 어딘가에 몰래 숨어서 울 공간이 있어야 함을 알았지. 나중엔 친구와의 문제도, 부모님과의 의견 차도, 남자 친구 이야기까지도 했었어. 선생님의 가족 분들도 뵙게 되어 종종 퇴근하고 함께 식사도 하곤 했어. 


  다른 동료들도 나와 보건 선생님의 끈끈함을 신기하게 바라보셨어. 모녀 관계랄까. 나도 선생님도 서로에게 애틋함이 있었어. 훗날 내 결혼식에 오셨는데, 신부 대기실에 오셔서 별말씀 안 하시고 그저 웃으며 내 눈을 바라보셨거든. 어린 교사였던 그때, 커피 향 가득한 보건실에서 힘을 얻고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나던 나날이 떠올라서 어쨌겠니. 감사함에 또 눈물 지을 수밖에 없었지.    


  보건 선생님 외에도 인문사회실에 계셨던 부장님, 나보다 어린데 당차고 씩씩했던 수학교사, '빛나고 둥글게'라는 좌우명 그대로 아이들을 대하던 영어 교사 등 특수동에서 내게 가르침을 주신 '교사' 분들이 너무 많았어. 유배지인지 알았던 곳에서 무지와 배움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나, 질문으로 무장한 설익은 내게 흔쾌히 교사가 되어준 분들이 안 계셨더라면, 난 아마 아직도 이 글을 완성하지 못한 채 내내 맴돌며 헤매고 있었을 것 같구나.


  학교에서 마주한 의문을 제 때 해결하지 못하면 뭉게뭉게 커져서 큰 구름을 이루고 빛을 가려 어둠 속에 갇히게 되더라. 아이들에게는 질문을 하는 능동적인 학습자가 되라고 했는데, 정작 교사인 나는 질문에 인색했던 것 같아. 보건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야. 어쩌면 대부분의 사회 초년생이 다 그럴지도 모르겠어. 질문을 하면 자기 분야에 대한 확신이 없거나 실력이 부족함이 드러날까 두려워서. 조개처럼 입 꾹 다물고 있기보다는, 주위를 한번 쓰윽 둘러봐. 혹시 시선의 끝에 질문으로 만들기도 애매할 만큼 미묘하고 작은 의문도 이야기로 풀어 물어볼 수 있는 선배가 닿는다면, 혹시 널 보고 미소 짓고 계시다면 잽싸게 달려가 그날부터 선생님의 두 손을 꼭 붙잡고 놓치지 말기를 바라. 교사에게도 교사가 필요해! 반면교사(反面敎師) 말고.



이 글은 교사로 10여 년을 근무하고 새로운 꿈을 좇기 위해 셀프 퇴직한 전직 교사가 한 특별한 후배 교사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에서 같은 전공을 선택한 뒤 결국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는 동료이자, 이제는 10년 지기 친구가 된 어린 벗. 그의 슬픔에는 함께 울고 기쁨에는 함께 웃었습니다. 늘 도움을 주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서로를 보듬으며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가 된 듯합니다. 이 글이 비단 학교현장뿐 아니라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비릿한 성장통을 겪고 있는 모든 어른이들과 함께 위로를 나눌 수 있는 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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