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사회 수업에서였던가 처음으로 '관료제'라는 개념을 배우고 익혔던 게 기억나. 개념을 쉽게 파악하기 위해 현대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관료제의 예시를 보고, 관료제의 장점과 단점이 정리되어 있는 표에 홀린 듯 별표를 쳤었지. 교과서에 표로 나올 정도면 십중팔구 시험에 나올 테니 외워야겠다는 생각이 만들어낸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시간이 흘러 학부 시절 들었던 교육행정학 수업에서 낡은 그 개념을 다시 만났어. 학교는 교사라는 전문직이 모여있기에 관료제 앞에 '전문'을 붙여 '전문적 관료제'라고 한다는구나. 관료직제와 전문직제의 혼합형이라, 조직화된 무질서적인 곳이며 특정 사건에 대해 함께 대응하지만 각각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이완 조직의 성격을 띤다며. 그 아래 학자들 각각 내린 정의가 서술되어 있긴 했지만, 대표로 서술된 건 저 정도였을 거야.
정제된 문장이 만들어내는 평면의 세계에서는 이와 같은 특성이 느슨함, 유동적, 보완적이란 옷을 입혀 설명되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불확실, 불안정, 모순적이란 표현으로 더 크게 와닿아. 교사 개개인은 저마다의 교과적 지식을 탑재한 전문가지만, 행정 업무를 위해 업무 분장을 하면 철저한 관료주의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지. 끊임없이 냉탕과 온탕을 오가야 하는 신세랄까.
어느 해인가 학교 부서와 조직을 개편하기 위해 큰 과도기를 거치고 있는 중이었어. 작년에 있던 부서가 사라지고 새 부서가 신설되고 3월 새 학기 시작까지도 업무 분장이 변해 3학년 담임이었다 교무부 기획이 되는 등 널뛰기 뛰듯 이동하는 교사도 있었어. 다들 저마다 말이 많았지. 학년부를 강화해야 한다, 방과 후 부서는 꿀부서 아니냐 도대체 방과 후 수업 어레인지 외에 하는 일이 뭐냐, 대세에 맞게 인문사회과 과학기술 부서를 신설해야 한다,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의 각축전이었지.
이쯤에서 질문 하나 투척해 볼까. 마치 밸런스 게임을 하는 듯한, 양 극단에 위치한 옵션을 주고 택 1을 해야 하는 질문을 해볼게.
A. 업무포털에 결제를 상신하면 내용을 읽지도 않고 무조건 결제하는 부장
B. 공문의 띄어쓰기나 마침표 하나 때문에 결제를 반려하는 부장
너라면 A와 B 중 어느 부장과 한 부서에서 일하고 싶니?
업무 분장과 부서 개편의 과도기를 통과할 때 첫해엔 A부장과, 그다음 해엔 B 부장과 함께 한 부서에 소속이 되어 일을 했었어. 두 분 다 훌륭한 인품을 가지셨고 부서원을 아끼시며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분이야. 실제로 두 분이 친하시기도 하고, 교원공동체도 함께 하고 있어서 나도 친분이 두터운 분이셨어. 하지만 역시나 일로 만난 사이가 되니 가끔씩 한숨을 포옥하고 쉬어야 하는 일이 생기더군.
A 부장은 부서 업무에 방목형으로 일관하는 분이었어. 마치 자율주행하는 자동차에 탄 운전자처럼 여유로운 얼굴로 계시다 가끔 간단한 조작만 건드리는. "아이고, 홍 선생이 어련히 알아서 잘했겠어요."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지금 쓰면서도 음성지원이 되는 듯 문장의 높낮이와 강조점이 생생하게 기억나네. 난 업무포털로 공문 처리도, 예듀파인 예산기안 상신을 많이 하는 편의 업무를 맡고 있었어. 공강 때 자리에 앉자마자 후다닥 써서 올리고 잽싸게 수업을 들어가곤 했지. A 부장은 내가 올리는 걸 기다렸다는 듯 칼 결제를 해주셨어. 혹시 급해서 핸드폰으로 전화를 드리면 잽싸게 오셔서 쿨하게 결제를 해주셨지.
그런데 한 번은 교감 선생님에게 전화가 왔어.
"홍선생, 아까 올린 거 첨부파일이 없는데 반려할 테니 다시 올려주겠어요?"
화끈화끈. 실컷 공문 내용을 장황하게 쓰고 첨부 1. 첨부 2. 도 줄 맞춰서 예쁘게 써 놓고는, 첨부파일을 붙이지 않고 그냥 상신한 거야. 역시나 우리 부장은 확인 없이 그저 결제.
이듬해에 마주한 B 부장은 업무도, 일상도 빈틈을 찾기 힘든 완벽주의자였어. 주차장에 차를 대신 것만 봐도 어쩜 좌우 주차선에 동일한 여백을 두고 주차를 하시던지. 어떠한 계절에도 목덜미에 닿기라도 하면 큰일 날 듯 늘 같은 기장의 짧고 단정한 머리를 고수하셨지. A 부장과의 자유로운 1년을 보내고 나서 그런지 내 업무를 꼼꼼히 살펴주셔서 초반엔 너무 감사했어.
하지만, 결제가 한 번에 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걸 몇 달이 안돼서 깨달았어. 흑흑. 지금 쓰면서도 서러움이 몰려오네. 어떤 결제를 올려도 모두 수정을 해서 올리셨어. 결제 올라가는 거 보며 수정 히스토리를 볼 수 있잖아. 정말 거의 매번 눈에 띄지 않는 띄어쓰기와 들여 쓰기, 때로는 문장 부호도 꼼꼼하게 수정하셨더라고. 어떨 때는 수정 전과 수정 후 문서를 좌우에 나란히 놓고 봐도 도대체 어딜 수정하셨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한 부분까지 알아채서 고치셨어. 당신이 직접 수정을 하실 때 절반, 수정을 요구하시며 반려하실 때 절반 정도였어. 그래서 B 부장에게 결제를 올릴 때는 엄청 긴장하게 되었지.
오늘은 원래 너에게 하려고 했던 말에서부터 많이 돌아온 것 같네. 거창하게 관료제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띄었지만, 결국은 난 학교가 모순되고 느슨한 전문적 관료 조직이라 나쁘지 않았다는 거야. 평교사인 나를 이끌어 주려 신경 쓰고 있는, 회사로 치면 상사의 자리에 있는 부장 교사가 있어서 교과 외적인 업무 분야를 배울 수 있었으니까. 함께 일하기 위해 모인 회사의 하나지만, 모두 무언가를 깨우치는 배움의 공간으로서의 학교. 일반 회사도 사수와 신입의 관계가 있다지만, 부장과 부서원으로서의 교사는 서로 다를 가능성이 높은 교과의 전문 영역은 한없이 존중하되, 행정 업무에 대해서 교류하게 되는 거니 조금 결이 다르긴 하잖아.
훈훈한 마무리를 했다. 그래도 만약 내게 '다시 교사로 일한다면 A, B 부장 중에 누구와 한 부서에서 일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난 선택지에 없는 상상의 C 부장이라고 답할래. 하하하. 네가 다음 해에 만날 부장은 어떤 분일지 나중에 만나면 얘기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