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고사도 마무리되고 겨울방학을 하기 한 주 전의 2학기 말의 어느 날이었어. 2학년 문과 아이 하나가 내 자리로 왔어. 1, 2학년 동안 회장도 매년 했던 것 같고, 수업 태도도 좋고 학업 성적도 괜찮은 아이였지. 손에 이면지 한 뭉텅이를 쥐고 있었어. 보자마자 알았지. '어, 생활 기록부네?' (지금은 작성 중인 생활 기록부를 출력해서 학생에게 나눠주면 안 되지만, 몇 년 전에는 일부 출력은 가능했단다.) 12월 말은 교과 진도는 이미 마무리되었고, 조금 남았다 해도 고사가 끝나서 시험 범위도 아니다 보니 아이들이 제대로 집중하지 않는 수업이 이루어지는 기간이지. 그래서 그 시기는 암묵적으로 학급 자치 시간이나 기말고사 서술형 답지 확인, 때로는 생활 기록부를 점검하는 기간으로 활용하곤 해.
"같이 활동한 ㅇㅇ은 진로활동 내용 5줄인데, 저는 왜 1줄이에요?"
"활동 내용이 달라서 그렇지."
"저 진로가 이쪽이라 이 기록이 필요한데 저도 이렇게 똑같이 써주시면 안돼요?"
"안되지."
"왜요?"
하아. 얘는 내가 겪어온 아이라 잘 알아. 절대 나쁜 아이가 아니야. 그저 무엇이 잘못인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배우지 못한 채, 이미 오래전에 길을 잃어버린 아이인거지. 마치 인문계 고등학교의 교육 방법과 방향처럼. 학생부 기재는 교사의 고유한 평가 권한이라 이렇게 와서 이야기하는 건 엄청난 월권이긴 해. 기재한 것 중 내용의 오류는 함께 말하고 확인할 수 있지만 기재 방식과 양, 내용 등에 대해서 말하려 하다니. 조금 더 깊이 생각했다면 그 아이도 오지 않았을 텐데. 처음에는 차분히 말해주었어. 그런데 마지막 "왜요?"라는 불성실한 질문을 받자, 최대한 성실하게 말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상대평가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ㅇㅇ이의 활동 내용과 빈도, 과제 적합성 모든 부분이 월등히 우수했어. 그리고 너의 참여율과 몰입도는 제출한 과제들을 검토한 결과 진정성이 없었어. 심지어 성실성도 떨어졌잖니. 불참도 많고 과제 제출 기한도 몇 번이나 미뤄준 뒤에 겨우 제출했고. 그래도 네가 모든 걸 제출한 정성을 참작해 몇 회 중 몇 회 불참했고 과제 제출이 며칠 늦었다는 팩트는 작성하지 않았단다. 이 정도면 납득할 만한 설명이 되었을 테니 그만 돌아가렴."
생활기록부기재요령 파일을 출력해 제본한 책자가 200p 정도 되었던가. 매년 바뀌는데, 학기 중에도 계속 바뀌어서 추가 수정사항을 알리는 공문이 몇 건씩 오곤 하지. 지역을 밝히면 안 되고, 사람 이름을 쓰면 안 되고, 학생이 직접 쓴 논문이나 책 활동은 쓸 수 없고, 학교 이름을 명기하면 안 되고, 학교를 유추할 수 있는 프로그램명도 불허하고, 기간을 쓸 때는 '2023.01.01.'의 형식이어야 하고, 시간은 '10:00-11:00'여야 하고, 되고 안 되는 것들이 너무 좀스럽고 중요치 않은 거라 전달받으면서도 짜증이 몰려오곤 했어. 허술하기 짝이 없는 기록 방식과 시스템을 가지고 있지만, 아이들은 생활 기록부에 목을 메야만 했어. 학생부 종합전형으로 대학을 가기 위해서는 생활 기록부의 영향력이 매우 컸거든. 진로활동의 노예가 된 아이들과 그런 아이들에게 좋은 생기부 기록을 만들어 놔야 한다며 은근히 부추기는 학교, 마침표나 쉼표 틀리는 것엔 혈안이 되었지만 정작 과열되는 분위기에는 무관심한 교육청과 교육부. 무엇보다 과정은 잘 모르겠고 그저 자신들이 정한 규칙에 맞게 훌륭한 학생을 선발만 하면 그만인 대학교.
난 고1 때 시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가, 엄마가 굶어 죽으려고 그러냐며 글은 취미로 쓰고 돈을 벌 수 있는 걸 찾아야 한다고 했어. 시인은 될 수 없지만 꼬박꼬박 백일장에 나가서 시를 썼어. 팔리는 글을 써야 하는 작가처럼, 효행 백일장이면 효심이 지극하게, 자연사랑 백일장이면 자연의 섭리와 생명 다양성 보존을 삶의 목표인 것처럼, 윤동주나 만해처럼 문학가를 기리는 백일장이면 그들의 성향과 색채가 드러나는 시를 썼어. 수상을 해야 했거든.
내가 다니던 학교는 신생 학교라 내가 1학년이 되었을 때야 1,2,3학년이 채워진 곳이야. 학교의 이름도 알려야 했고, 대학을 가야 하는 우리는 대외상이 필요했으니. 늘 학년별 정예부대가 함께 돌아다녔어. 산문파/ 운문파가 나뉘어서 출격했지. 소 뒷걸음치다 쥐 잡기처럼 몇 번 수상권에 들었어. 그 뒤 국어 부장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변했어. 그리고 어느 날, 엄청 큰 상을 받아버렸어. 바로 대통령상. 학교 교문에 플래카드도 걸렸어. 아빠는 내가 알면 싫어할 게 뻔하니, 주말 새벽에 몰래 와서는 교문 머리에 걸린 플래카드를 캠코더로 찍기도 했어.
학교에는 글로 대통령 상을 받은 아이로 소문이 났지. 다들 내가 쓴 시 한 편 읽어보지 않았으면서, 하루아침에 글을 엄청 잘 쓰는 아이가 되었어. 나도 학생부 종합전형, 그 당시는 수시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대학에 입학했어. 문학 특기자가 아니라 학업 우수자, 생기부 우수자로 지원했는데 대통령 상을 비롯해 소소하게 채워둔 대외상 기록이 아마 보탬이 되었을 거야. 한동안 우리 집 거실에 그 상장과 상패가 전시되어 있었어. 운 좋게 수시로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 같은 학년 아이들의 대입 자기소개서를 봐줬고, 같은 동네에 사는 엄마친구딸인 중학생 아이의 국어 공부도 봐주며 용돈을 벌기도 했어.
대통령의 입김이 세기도 셌다 참. 왜냐면 나는 지금도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있잖아. 교사가 되어서도 진로와 무관한 기록이 난무하는 생기부를 잔뜩 비웃었지만, 그 상이 인도한 내 인생을 생각하면 기록에 목매는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어. 그땐 대외상 하나, 체험활동한 줄, 세부특기능력사항 한 개가 내 삶을 더 빛나는 곳으로 이끌고 갈거라 굳게 믿었던 것 같아. 아이들이 과열될 수 있으니 부디 넌 나보다 더 잘 이끌어 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나저나, 그래서 그 상은 지금 우리 집 책장에 잘 모셔져 있을까? 아니, 사실 어디 있는 지도 모르겠어. 이사를 할 때마다 트로피를 감싸고 있는 유리 케이스가 깨질까 부담스러웠던 기억은 남아있는데. 결혼을 하고 난 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때 내 인생 가장 빛나는 성과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인생 뭐 다 그런 거 아니겠니. 살아보다 보니 그렇게 흘러가는 거.
이 글은 교사로 10여 년을 근무하고 새로운 꿈을 좇기 위해 셀프 퇴직한 전직 교사가 한 특별한 후배 교사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랑하는 제자에서 같은 전공을 선택한 뒤 결국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는 동료이자, 이제는 10년 지기 친구가 된 어린 벗. 그의 슬픔에는 함께 울고 기쁨에는 함께 웃었습니다. 늘 도움을 주기 위해 애썼지만 결국 서로를 보듬으며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가 된 듯합니다. 이 글이 비단 학교현장뿐 아니라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비릿한 성장통을 겪고 있는 모든 어른이들과 함께 위로를 나눌 수 있는 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