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몇 번의 축제를 했지. 네가 주축이 되어 축제를 준비했던 해 였을거야. 이젠 무슨 프로그램을 준비했었는지 따위는 자세히 떠오르지 않아. 기억나는 거라곤 축제 전날 이제 제발 집에 좀 가자고 애원하던 나, 갈 생각은 전혀 없고 그저 까르르 거리며 웃을 때마다 신나게 들썩이던 너희들의 어깨, 그리고 산더미의 딸기.
딸기 하니까 이제 하나 둘 떠오른다. 너희는 우리 부스를 찾아온 아이들에게 단계별 미션과 퀴즈 같은 걸 내서 맞추거나 틀리는 결과에 따라 음료를 선택하게 하고, 마지막에 그 음료를 다 섞어 칵테일을 주는 프로그램을 한다고 했어. 넓지도 않은 교실에 부지런히 책상과 의자, 박스를 쌓아 구역을 나누고 몸을 움직여 게임을 하는 곳을 곳곳에 만들었더라. 코너 곳곳엔 훗날 칵테일이 될 각종 음료와 냉동 과일, 시럽들이 잔뜩 굴러다녔지.
그 와중에 딸기가 너무 많더라고. 주문을 잘못해서 많이 사게 되었다 했던가. 축제 전날, 축제 당일 내내 교실엔 달큼한 냄새가 가득했어. 하기로 했던 거 맞나 싶었지만, 왜인지 한 귀퉁이에서는 어디선가 조달해 온 솜사탕 기계가 달달 거리며 돌고 있었어. 딸기와 시럽들도 모자라 설탕 가루와 한때 설탕이었던 솜사탕 덩이들까지. 교내 개미와 바퀴벌레 정모는 당분간 우리 교실에서 이루어지겠구나 싶었지.
아이고. 종이컵을 한쪽에 미리 세팅해 놓으면 대기줄이 좀 줄어들 텐데. 집게보다 비닐장갑을 끼고 냉동과일을 넣으면 바닥에 덜 흘릴 텐데. 키친타월 말고 물티슈로 닦으면 끈적이지 않을 텐데. 부엌살림을 좀 해본 아줌마의 입장에서 좀 더 효율적인 그림이 대번에 그려졌지만, 그대로 두었어. 치울 때 고생 좀 해봐라. 그럼 다음 해에는 딸기도, 시럽도, 설탕도 사달라고 안 하겠지 싶어서. 어설픈 너희에 비해 누군가 낑낑 거리며 가져왔을 대형 아이스 박스의 성능은 너무 좋더라. 냉동 딸기가 암석처럼 커다란 덩어리로 한 데 얼어 있는 채로 어찌나 오래가던지. 한 녀석이 "이렇게 하면 더 빨리 녹아!"라 소리치며 암석화 된 냉동딸기를 봉투째 들어 교복 니트 베스트 안에 넣었지. "아 차가워! 으흐흐흐" 바보스러운 웃음소리와 과장된 행동이 어우러진 너희만의 방식이 나는 더 좋았어.
축제는 학생들의 날이잖아. 동료 교사들과 학교를 돌아다니며 학생들이 만든 부스를 구경하고, 사진도 찍어주며 아이들을 살폈어. 우리 교실도 그렇지만, 다들 따분한 사각형의 교실을 알록달록 예쁘게도 꾸며놨더구나. 귀신의 집을 만든 아이들은 모든 창문에 신문지를 붙여 암실을 만들었고, 미로체험 부스를 만든 아이들은 박스를 거의 천장까지 쌓아 올려 꼼꼼한 미로길을 만들었더라고.
강당에 모여 공연과 행사, 장기자랑까지 마치고서야 축제가 마무리되었어. 재밌는 순간은 다 지나갔고, 이제 너희에게 남은 건 지루한 뒷정리와 청소였지. 내일부터 다시 수업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제대로 되돌려 놓아야 함을 공지하고, 준비할 때처럼 역할과 방법은 너희끼리 자율적으로 해 보도록 그냥 둬 봤어. 너무 안된다 싶으면 개입해야겠다 마음먹고 잠시 자리를 비웠지.
얼마 뒤 가보니 책상과 의자 배열을 하고 있고 얼추 마무리된 것 같더라. 그런데 축제 내내 존재감을 뽐내던 딸기가 역시나 마지막까지 질기게 머물고 있더라고. 바닥에 떨어진 딸기를 밟고 다녀서 교실 곳곳에 끈적한 흔적을 남겨둔 거야. 딸기 자국이 심하게 남은 바닥에 두어 명이 웅크리고 앉아 바닥을 닦고 있었어. 그중 하나가 너였지. 바닥에 붙은 딸기를 맨손으로 떼며 축제 전날처럼 신나게 까르르거리고 있었어. 축제 준비를 할 때 나서서 재밌는 역할을 도맡아 하던 아이들은 다 어디로 사라져 있고,
"그거 그렇게 맨손으로 하지 말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샘! 제 손에서 딸기 냄새 엄청나요! 크크크크"
준비를 할 때는 잘 드러나지 않는 일 주변에 오래 머무르는 널 봤었어. 거짓말 아니고 선생님들은 임장 하며 대충 돌아다니는 것 같지만 사실 누가 무얼 하는지, 안전을 위해서라도 면밀히 다 보고 있거든. 역시나 묵묵히 조용히 있더라고. 그런데 정리를 하는 시간에 네가 가장 돋보이더라.
착한 사람 착한 사람이 무슨 소용 있나요
델리스파이스의 '나도 어른이거든요'를 들으면 저 가사에서 멈칫하곤 해. 교사가 된 너는, 고등학생 시절 다들 슬슬 피했을 궂은일을 해맑게 웃으며 해내던 모습 그대로 같더라. 곁에서 가까운 사람이 된 나로서는, 좀 더 눈에 띄는 일을 더 적극적으로 해주면 좋겠는데 싶은 욕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우리가 함께 보냈던 어느 해 축제의 기억. 나의 그 낡은 기억에서 너의 미래를 봤어. 분명 꾸준하고 묵묵한 너의 모습을 누군가 알아봐 줄 거야. 착한 사람, 착한 교사가 가는 길을 계속 응원할게. 너처럼 둥글어도 반짝 빛날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