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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이 Feb 26. 2021

그립다. 늙은 내 강아지의 청소년 시절

솜뭉치 같던 솔이는 나날이 폭풍 성장했다. 어느 날 문득 보면 어깨가 떡 벌어져 있고, 다음 날 돌아보면 다리가 한층 길어져 있었다. 가족들은 농담 삼아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솔이는 하루에 30cm씩 자라는구나.’ 


장모견의 특성상 겉 털과 속털이 자라는 털찜 시기도 함께 왔다. 털이 찌면 본래 크기보다 엄청 커 보이곤 한다. 목욕할 때 물에 젖은 걸 보면 분명 몰티즈 만했는데, 목욕을 마치고 드라이를 하며 털을 말리면 갑자기 사모예드 한 마리가 어디서 왔지 싶었다. 솔이를 보고 동네 아이들 중에는 ‘우와, 상근이다.’라고 까르르거리곤 했다. 이럴 수가. 10kg 조금 넘는 솔이를 초대형견인 그레이트 피레니즈로 보다니. 나도 누가 잘못 봐서 한혜진 언니나 니콜 키드먼 만하게 봐주면 참 좋겠는데. 아무리 힐에 올라타도 내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다. 털찔 일은 더더욱 없겠고. 


쑥쑥 자란 솔이는 금세 동네에서 짱 먹는 강아지가 되었다. 당시 솔이는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었고, 아파트에서는 중형견 이상을 만나기가 어려웠라. 구찌였나 샤넬이었나. 여하튼 저런 풍의 호사스러운 이름을 가진 검정 레브라도 친구 빼고는 솔이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아니 이렇게 큰 애를 어떻게 아파트에서 키워요우.’라는 말을 듣는 강아지로 커져만 갔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웬만한 길고양이들의 체격을 훌쩍 넘었다. 그러자 가르쳐 준 적 없음에도 시골쥐 같은 얼굴을 한 주제에 고양이들에게 시비를 걸고 다니는 동네 건달 강아지로 진화했다. 산책길에 나선 솔이를 멀리서 먼저 보고 수풀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에게도 굳이 위협적으로 달려갔다. 솔이를 피해 나무 위로 도망친 고양이를 향해 괜히 웡웡 짖으며 ‘내가 바로 이 동네 짱 먹는 강아지임!’을 과시했다. 아파트 앞 실외 주차장에서는 시야를 한껏 낮춰 살피며 차 아래에서 쉬는 고양이들의 평화도 살뜰히 깨부수었다.


어느 날부턴가가 자주 가는 공원 근처에 있던 세탁소에 턱시도 고양이 한 마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마 가게 안에서 키우는데, 가게 문 밖에 둘 때가 종종 있는지 몇 번 보게 된 후부터. 우리 가족은 그 아이를 ‘세탁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느 날 인가의 산책길에 솔이가 그 녀석을 보았다. 너 고양이? 나 솔이! 으르렁 거리는 것과 함께 한껏 부풀린 꼬리를 엉덩이 끝에 높이 세우고 세탁냥이를 향해 푸르르 달려갔다. 총알처럼 튀어나간 솔이 탓에 리드줄은 느슨할 세 없이 팽팽해질 때까지 주욱하고 늘어났다. 그런데 상대는 산전수전 다 겪은 고양이였던 모양이다. 골목대장 솔이의 허세를 한눈에 알아챈 것. 세탁냥이는 순식간에 털을 바짝 세우고 등을 아치형으로 둥글게 만 채 그 자리에서 위협적인 자세를 취했다. 사실 그때 나는 ‘예, 고양이님. 저희들이 살펴 가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살기를 느꼈다. 하지만 우리 솔이는 천둥벌거숭이라 멈출 줄 모르고 세탁냥이의 사정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순간 파박 파바바 박, 몇 번의 냥 펀치가 있었는지 모르겠고 팽팽했던 리드 줄은 느슨해져 있었다. 솔이는 어느새 어리둥절한 얼굴로 내 발 밑에까지 바짝 후퇴해 있었다. 


그 이후 솔이는 세탁소 주위에 동그란 결계를 쳤다. 금(禁)솔의 구역이 된 것이다. 패배의 기억은 쓰고 강렬했다. 그 날 이후 몇 번인가 세탁냥이를 봤지만, 마치 눈에 안 보이는 듯 투명 고양이 취급을 하며 애써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지나치는 솔.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에 굳이 “솔아 솔아! 저기 세탁냥이 있는데?”라고 말하면 솔이는 매우 오버스럽게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찾는 시늉만 하다 마치 무언가 잊고 있던 일이 생각났다는 듯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갔다. 


솔이는 냥 펀치 콤보의 현장을 오래 기억했다. 다른 아파트로 이사를 갈 때까지 그곳을 지나가려 하지 않고 둥글게 돌아가곤 했다. 이 녀석도 우리처럼 정신 승리를 하며 버티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제는 고양이를 봐도 본체만체하고, 고양이들도 솔이를 본체만체하는 걸 볼 때마다, 허세스럽게 센 척하며 동네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니던 청소년 솔이의 바쁜 엉덩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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