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꼬리를 쳐주다니. 기다림과 반가움과 꼬리의 상관관계.
2020년 3월 10일 저녁, 무늬가 집에 왔다. 코로나 대유행 초반이라 모두 삶을 유지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우왕좌왕하던 바로 그때였다. 급격한 코로나 확산세를 고려해 회사에선 전 직원에게 재택근무를 권고했다. 당장 비대면으로 처리해야 할 업무 방식에 대한 상상력을 짜내느라 골치는 아팠지만, 입양 후 바뀐 환경에 곧장 무늬를 혼자 두고 출근하지 않아도 돼서 조금 안심이었다. 텀블러에 수혈용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담고 파자마 차림에 상투를 틀고 느적느적 걸으며 거실 테이블로 출근했다. 물론 출근하는 길에 서재방에 똬리를 튼 뜻밖의 귀여운 재택근무 동료에게 느긋하게 아침인사를 건네는 것 또한 잊지 않았다.
한참 바쁘게 돌아가곤 한 3월의 평일 낮. 회사가 아닌 집에 있는 것도 이례적인데 더구나 이 집 어딘가에 나와 남편이 아닌 다른 생명체, 심지어 너무 작고 약하고 겁먹은 강아지가 있다는 것까지. 두 가지 의미로 이상했다. '우리 집에 강아지라니, 말도 안 돼!'의 마음과 '음, 생각보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데?'의 마음이었다. 코로나 역시 이 어색한 변화에 한 몫하고 있었다. 분명 문 밖 세계는 예상치 못한 채 도래한 역병과 환란의 시대의 초기답게 혼란스러워 보였다. 이 풍랑 속을 난파하는 작은 쪽배같이 정신없이 휘청일 줄 우리 집은 의외로 꿋꿋하게 일상을 영글고 있었다. 고요하고 평온했다. 마치 지구 상에 남은 몇 안 되는 쉘터처럼.
일하다 허리를 펴고 스트레칭을 해야 하기도 했지만 실은 자꾸만 무늬가 눈에 아른거려서 무늬가 있는 방을 들락날락거렸다. 너무나 작은 무늬는 너무도 큰 나를 올려다보기 위해 눈을 한껏 치켜떴다. 눈 아래 초승달처럼 얇은 흰 자가 떠올랐다. 낯설고 두려워 보이는 표정과 달리 건방져 보이는 눈매가 귀여웠다. 방석에 엎드려 도넛처럼 똬리를 틀고 있는 무늬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무늬 앞에 아기 자세를 하고 엎드렸다. '무늬야'라고 불러봤다. 앞으로 난 이 이름을 얼마나 많이 부르게 될까. 힐끔거리는 무늬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 안에 평화가 있었다. 온 세상의 평화를 까만 두 눈 속에 짊어지고 온 나의 구원자. 나의 강아지.
햇빛이 좋을 땐 하늘을 볼 수 있게 서재방의 커튼을 걷어 주었다. 먼지가 없는 날엔 거기에 창문도 살짝 열어줬다. 무늬는 크던 작던 밖에서 나는 모든 소리에 공평하게 놀라곤 했다. 집 안에 머물다 지나가는 바람의 길목에서 고소한 냄새가 묻어 거실까지 날아왔다. 나와 남편 냄새뿐이던 우리 집 냄새에 이젠 무늬의 냄새도 함께 섞이겠구나 생각하니 또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4월로 들어서며 회사는 팬데믹에 걸맞은 오프라인 업무 환경을 갖추었다. 다시 성실한 주 5일 출근자가 되어야 했다.(젠장) 여름 퇴사 전까지 당분간 무늬는 주중엔 영락없이 8시간 정도를 집에 혼자 있어야 했다. 물론 3월에도 무늬를 혼자 집에 두고 남편과 짧게 외출을 하기도 했다. 다녀와 살펴보면 무늬의 공간은 마치 시간이 멈췄던 듯 우리가 나가기 전의 모습, 공기마저 그대로였다. 무늬는 우리가 집을 나서는지 들어오는지 관심도 없고 마치 화분처럼 햇빛이 흐르는 쪽으로 조금씩 몸의 방향을 돌릴 뿐이었다. 오히려 가끔은 외출하고 돌아온 우리의 움직임과 소음에 놀라는 듯했다. 남편은 입을 삐죽이며 "무늬는 우리가 없는 조용한 집이 더 좋은가 봐. 짜식."이라며 서운함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에 집에 무늬 바라보기용 홈캠을 설치했다. 회사 컴퓨터 모니터 왼쪽 아래에 핸드폰을 거치해두고, 캠 화면을 띄워 무늬를 살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닷새. 출근 첫 주 동안 무늬는 아무 사고도 치지 않고 혼자서도 의연하게 잘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했다. 잘 있기는 한데 너무 움직임이 없다. 원래 무늬는 우리가 집에 있어도 잘 안 움직이긴 했다. 그렇지만 7-8시간 동안 이렇게까지 움직이질 않고 잠만 잔다고? 하물며 물을 마시기 위해서라도 몸을 일으켜 걸어야 하는데 일어나지 않는다는 건 그 시간 동안 물도 한 모금 안 마셨다는 거다. 조금 꼼지락 거리는 듯 안 본 사이 자세를 미묘하게 바꿨지만 자기보다 조금 큰 침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어떤 책에서는 무기력한 아이가 그런 거라 했고, 다른 책에서는 안정감이 큰 아이라 그런 거라고 했다. 물론 어느 쪽인들 안심할 수 없었다.
난 무늬가 혼자 있는 동안 무얼 하기를 바랐던 걸까. 물론 라면 같은 간단한 음식으로 스스로의 끼니를 챙기고 넷플릭스도 보다 내 생각이 나면 간간히 카톡으로 우스꽝스러운 셀카도 보내줄 정도를 바랐던 건 아니다. 물론 아주 가끔 웃기는 상상은 하긴 한다. 집에 있는 무늬가 외출한 내게 '언제 와? 올 때 메로나.'라고 톡을 보내는.
전전긍긍하며 우리만 기다리길 바라는 것 또한 아니었다. 반려인과 분리 불안을 가지지 않고 의젓한 무늬가 대견하기도 했다. 단지 혼자 있는 시간이 조금은 편했으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었다. 온몸에 힘을 주고 무언가를 버티고 있는 아이 같았다. 4월이 가고 5월이 왔다. 입양 2개월부터는 노즈 워크의 재미를 알게 되어 작은 공과 인형 속에 들어있는 간식을 코와 입, 손을 이용해 빼먹는 놀이에 빠졌다. 출근 전 노즈 워크 장난감 몇 개에 간식을 채워두고 나왔다. 간식을 빼내는 동안 잠시 움직이다 이내 침대로 돌아가 긴 잠에 빠졌다.
우리가 퇴근해서 집에 들어와도 달라지지 않았다. 고개도 아니라 눈동자만 살짝 돌려 쳐다보는 시늉만 할 뿐. 보통은 바로 산책을 나가야 했기에 외출복과 하네스를 매는 데 못 이기는 척 소극적인 동조를 할 따름이었다. 기다림의 끝에는 우리가 있고, 우리가 와야 기다림이 끝났다. 하지만 무늬는 기다림의 시작과 중간 단계와 끝 모두에 우리가 있고 없음이 그다지 관련 없는 것 같았다.
무늬는 우리를 언제 반겨줄까?
무늬는 언제 우리에게 꼬리를 쳐 줄까?
때때로 조금의 서운함을 담아 남편과 나는 번갈아가며 서로에게 질문을 하곤 했다. 하지만 둘 다 반려견이 인간을 반기기 위한 존재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굳이 열렬한 환영까지는 해 주지 않아도 괜찮기는 했다. 다만 서로 좋아하고 있다는 호감을 주고받고 싶기는 했다. 현관에 들어서는 내게 거실 소파에 누워 눈만 마주치고는 세상 태평한 톤으로 "왔어?"라 말하는 언니처럼, 우리는 상냥한 말투와 온화한 웃음을 짓고, 무늬는 뱅글뱅글 돌거나 꼬리를 샥샥 쳐주는 것으로. 벚꽃이 흩날리고 봄바람이 살랑였지만 무늬의 꼬리는 생각보다 굳건하고 단호한 겨울 설산의 빙벽 같았다. 포실포실한 저 꼬리가 언젠간 탱글탱글 탄력을 받으며 좌우로 경쾌하게 흔들리... 겠지? 기다리자. 조급해하지 말자. 무조건적인 애정이 고파서 무늬와 함께 살기로 한 건 아니었잖아.
그리고 6월 중순의 주말 아침이었다. 식탁에 앉아서 아침을 먹을 때였던가. 어느덧 서재방을 나와 거실에 진출해있던 무늬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살포시 다가왔다. 꼬리를 살랑이며. (계속)
무늬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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