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강아지의 보드라운 터럭에 대한 단상
무늬의 털은 비단결, 그 이상으로 곱고 부드럽다. 심지어 비단의 서늘함과 달리 무늬의 털은 따뜻한 온기마저 품고 있다. 비단과 개털을 견주는 것에 대해 선 넘었다 여길 수도 있겠지만, 무늬를 쓰다듬어본 대부분의 사람들이 입을 모아 부드러움에 대해 찬양한 것만큼은 팩트다. 우선 한 달에 두 번 정도 만나는 무늬의 매너 클래스 코치님은 '무늬 오늘 스파 하고 왔어요?'라고 물으신 적이 있다. 두세 번 물으셨는데 그때마다 '아뇨, 목욕 한지도 오래되었어요. 껄껄껄.'이라 말했더니 언젠가부터는 '무늬, 스파 안 한 거죠?'라고 물으셨다. 무늬의 일상을 올리는 SNS로 소통하다 실제로 만나게 된 인스타 친구분도 '어머, 사진이랑 영상으로만 봐서 몰랐는데, 무늬 털이 이 정도로 고왔는지 처음 알았어요. 너무 여리여리해요.'라고 말하셨다. 하다 하다 이젠 털 자랑까지 하는 팔불출로 보이겠지만, 무늬를 안고 있으면 안고 있는데도 또 안고 싶고 영원히 안고 있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강아지 털이 지닌 부드러운 촉감, 생각보다 큰 위로였다.
6kg의 무늬는 중량으로는 나의 반의 반의 반 정도 되지만, 그에 비해 털은 무럭무럭 길게 길게 자란다. 아마 중간에 다듬어 주지 않으면 어릴 때 총채라고 불렀던 추억의 하얀 먼지떨이의 기장만큼 자랄 것 같다. 백색의 간달프, 배추도사 무도사의 무도사처럼 백발이 성성한 현자의 아우리를 풍기는 강아지라니. 어느 날엔 인생 상담 진하게 받고 싶을 만큼 도사 같이 보일 때도 있다. 여름날 아침 햇살 받은 모습을 보면 폭스바겐 마이크로버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꿈과 사랑을 쫓던 히피의 자유분방한 느낌도 있다. 무늬의 존재 자체가 이미 러브 앤 피스이기도 하고.
좀 더 솔직해져 볼까. 실은 무늬의 털은 무늬의 몸에 붙어 있을 때만큼은 '아이고 예쁘다.'이지만, 몸에서 털이 떨어지는 순간 '예쁘다'도 함께 떨어진 채 그저 '아이고'만 남는다. 우리 집 갈색 마룻바닥, 차의 바닥과 시트 사이사이, 소파와 침대 언저리에 머무는 건 기본이고 엄마에게 돌려드린 빈 반찬통에도 살포시 올라타 긴 여행을 한다. 김치 냉장고 서랍엔 도대체 언제 들어간 건지 짐작도 안 간다. 분신처럼 내 주변을 맴돌며 '나 여기 있어요~'라 외치듯 존재감을 발휘하는 털들이여.
털고 쓸고 치워도 집 안 구석마다 동글동글 굴러다니는 솜사탕 한 입 정도 크기의 털 뭉치. 코와 입에 감기는 횟수가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릴 즈음 핸드폰을 든다.
'선생님, 때가 되었어요. 무늬 시원하게 밀어주세요.'
무늬의 단골 미용실 선생님도 또 한 분의 진성 무늬 털러버시다. 장발 단속에 1등으로 걸릴 듯한 치렁치렁 야성의 털쟁이 무늬를 데리고 미용을 하러 가면, 갈 때마다 '아유~ 이렇게 예쁜데 왜 다듬으시려고요.'라고 하신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시라 믿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이유를 말하기 전까지 계속 물어보시기 때문. 여러 말할 것 없이 '감당'이라는 단어를 넣어 짧게 얘기하면, 바로 직전까지 말리시던 분치곤 매우 격하게 끄덕이시고 수긍하신다. 격한 끄덕임 속에서 '오죽했으면' 이란 말을 듣는다. 강아지 키우는 사람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는 듯하다. 털북숭이들의 털로 대동단결!
다행히도 무늬는 털을 다듬을 때 크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 보인다. 미용사 선생님도 무늬가 평소엔 겁이 많아 보였는데 털 정리를 할 때는 의외로 느긋하고 편한 태도를 보여 다행이라고 하셨다. 털을 자르고 와서 집에서도 이상 행동을 보인 적도 없다. 그럼에도 무늬 털을 정리 해주고 나면 거의 늘 후회한다. 1시간 넘게 털 날리는 공간에서 낯선 손길과 가위질, 시끄러운 드라이기 소리들을 견딘 건 무늬인데, 막상 무늬에겐 뭐가 좋은 일일까 싶다. 태어난 그 모습 그대로 살아도 완벽한 아이이다. 불편하고 거슬리는 게 많은 인간이랑 어울려 사느라 하는 고생 중 또 하나가 추가되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또 한쪽에서 비죽 솟아나는 합리화를 위한 비겁한 변명들을 떨치지 못한다. 이를테면 '여름엔 털 때문에 더울 테니 짧게 다듬어 주는 게 무늬에게도 좋을 거야. 털이 엉키고 꼬이면 산책할 때 털 속에 이물질이나 진드기가 붙어서 무늬가 다칠 수도 있어.'와 같은 것들이다.
털을 다듬는 게 반려견에게 꼭 나쁘다는 뜻 절대 아니다. 반려견의 털 정리를 하며 귀와 발, 입가, 생식기 근처 등 위생에 취약한 부분을 관리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다만, 보기 좋거나 유행하는 스타일로 털을 정리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혹은 자주 미용을 하거나 요즘엔 잘 못 봤지만 특정 부분의 털을 염색하는 일은 기괴하고 흉측하다고 생각한다. 또 여름이 왔다. 장마 때문에 비가 오고 가지만 확실히 더워졌다. 무늬는 곧잘 헥헥거리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우리 집구석에도 슬슬 무늬 털로 만들어진 작은 솜사탕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족 모두 블랙, 네이비, 브라운 등 어두운 계열의 옷을 입기를 포기한 지 오래다. 그 정도의 알량한 포기와 털을 미는 수고스러움을 병치해도 될까. 쓸데없이 생각만 많아서 고뇌에 빠진 채 답도 내리지 못하는 동안 무늬의 털은 또 자라고 있다. 언젠간 자신 있게 '무늬야, 너의 털까지 사랑해!'라고 말하고 싶다. ㅠㅡ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