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하이록스 인천 이후 6개월.
어느새 경기의 후반부로 향하고 있다.
록스 아웃을 하며 시계를 보니 43분이 지나고 있었다.
확실히 지난번 보다 훨씬 빠르게 진행 하고 있었다.
6번째 러닝.
이제 슬슬 페이스도 떨어지고 다리가 묵직해질 타이밍이 오는 시기다.
어떻게든 참아내야 한다.
파트너의 얼굴을 슬쩍 보았을 때 파트너도 많이 힘겨워 보였다.
근데 나중에 찍힌 사진을 보니 나도 뭐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두 번째 전광판을 보고 이제 반 바퀴만 더 달리면 파머스캐리 스테이션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쳐가는 순간이지만 다시 한 번 텐션을 끌어올릴 차례다.
24kg의 케틀벨을 양손에 총 48kg의 무게를 들고 200m를 전진해야 한다.
이번 서울 대회에서는 스테이션 내에 펜스로 구불구불하게 설치된 구역을 2바퀴를 돌면 200m였다.
파트너가 먼저 시작하기로 했던 스테이션, 케틀벨을 양손에 들고 파트너가 전진했다.
지난번과 비교해도 말도 안 될 정도로 빨라졌고, 그 템포에 나도 자연스럽게 어? 좋은데? 하면서 신났다.
"교대!" 파트너가 케틀벨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외쳤다.
이젠 내 차례였다.
여태까지는 이 케틀벨 자체를 잡는 순간부터 손바닥도 아프고 무겁고 금방 힘들어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생각보다 무거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나도 빠른 속도로 걸었고 일단 50m정도를 전진했다.
남은 거리 : 100m
파트너와 다시 교대했다.
생각보다 이 케틀벨 무게가 정말 무겁지 않아서
다음번 내 차례가 되면 뛰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파트너는 첫 번째 구간보다 조금 느려진 것 같았지만,
지난번과 비교하면 여전히 훨씬 빠르고 안정적인 템포였다.
그 모습을 보며 ‘이번에는 진짜 우리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내 순서.
나는 케틀벨 손잡이를 다시 움켜쥐고 앞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때도 신기하게 무게감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가 더 잘 움직였고, 발걸음도 단단하게 박혔다.
90도로 꺾이는 지점에서는 마라톤 반환점에서 하던 백턴을 그대로 써서 턱 하고 방향을 전환했다.
그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그 순간 스스로도 놀랐다.
손바닥 통증은 없진 않았지만 어깨도 괜찮았고 호흡도 무너지지 않았다.
마지막 30m정도의 구간을 파트너에게 맡겼고 그대로 둘이 함께 파머스 캐리를 종료했다.
그리고 나중에 기록표를 확인했을 때
우리가 오픈 더블 전체 참가자 중 파머스 캐리 부문 47위였다는 사실을 보았다.
하이록스를 뛰면서 파머스 캐리에서 이 정도 순위를 받아본 건 처음이었다.
우리가 쌓아온 힘이 정말 눈에 보였던 순간이었다.
이제 남은건 샌드백 런지와, 월볼 두 개 뿐이었다.
은근히 힘을 썼던 스테이션인 파머스 캐리.
시계를 보니 심박이 170초반까지 올라간 것을 확인했다.
7번 째 러닝이 끝나고, 샌드백 런지 구간으로 진입했다.
20kg의 샌드백을 목 뒤에 걸치고 100m를 전진해야 한다.
하이록스에서 힘들지 않고, 싫지 않은 구간이 어디있겠냐만은 난 샌드백 런지는 제일 싫다.
나는 이 샌드백 런지도 많이 힘들어 했다.
이유는
7번째 러닝이 끝나고 들어올때가 되면 허벅지는 이미 타들어가는 느낌이 들고 묵직하게 무거워진다.
이 다리가 묵직한 상태로 해야되는게 샌드백 런지다.
샌드백을 목 뒤에 걸치는 순간 정신 집중 했다.
힘들긴 했지만 ‘이번엔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린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다.
원래 계획은 ‘10개 하고 교대하자’였다.
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니 둘 다 생각보다 힘이 남아서 였는지,
고통을 이 악물고 참으면서 한건지는 모르겠다.
일단 각자의 순서가 되서 런지를 시작하면 10개는 최소였고, 대부분 13개에서 15개는 하고 교대했다.
특히 파트너는 샌드백 런지에서 나보다 훨씬 강했다.
런지 동작의 템포와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도 빨랐다.
둘 다 한 번도 쉬지 않았다.
작년에도, 직전 5월 인천 대회때도 힘들면 그냥 그자리에서 몇초를 서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교대하면 바로 내려앉았고, 다시 일어나면 바로 전진했다.
멈추지 않고 빠르게 가다보니 어느새 100m를 통과했다.
나중에 기록을 보고 알았지만 우리가 이 샌드백 런지에서
오픈더블 전체 36위를 했다.
내가 가장 싫어하던 구간에서 가장 뚜렷한 성장을 해냈다는 사실.
이 순간만큼은, 정말 조금 뿌듯했다.
마지막 러닝이다.
이 러닝 1km만 뛰면 이제 월볼 스테이션. 그것만 100개 던지면 이 모든게 끝난다.
허벅지는 이미 묵직했고, 심박은 계속 높게 유지되고 있었다.
파트너도 마찬가지였다.
옆에서 뛰면서 슬쩍 슬쩍 본 파트너의 보폭이 조금씩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 흔들림조차 “무너짐”이 아니라 “버티는 움직임”이었다.
전광판에 드디어 마지막 스테이션 월볼로 진입하라는 문구가 떴다.
"마지막!!!"
"아!! 죽겠다!!"
나랑 파트너가 록스존에 진입하며 소리를 한 번씩 꽥 지르고 월볼 스테이션으로 진입했다.
월볼.
6kg의 메디신볼을 지정된 타겟에 정확하게 맞춰 100개를 채워야 한다.
하이록스 경기장 한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고 가장 큰 함성이 울리는 곳.
여기까지 도착한 모든 참가자들이 마지막 남은 힘을 끌어올려 버티는 스테이션이다.
이것만 넘기면 진짜 끝이다.
이번 서울 대회는 엘리트 경기에서나 보던 전자식 카운팅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맞추지 않으면 단 한 개도 인정되지 않는 방식.
그만큼 집중해야 한다.
메디신볼을 들어 올렸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첫 스쿼트, 그리고 첫 번째 월볼.
공이 타겟에 정확히 닿으며 전자판에 ‘1’이 찍힌 걸 확인했다.
‘어? 진짜 바로 숫자가 찍히네?’
그동안은 심판이 뒤에서 수기로 세어주던 방식이었기 때문에,
이 순간이 조금 신기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전자식 센서는 냉정했다.
타겟에서 살짝만 빗나가도 LED 화면에 빨간 불이 뜨고, 카운트가 올라가지 않았다.
연속으로 세 번이나 노렙(no rep)이 뜨자 살짝 멘탈이 흔들렸다.
‘아... 이건 진짜 정확히 맞춰야만 인정되는구나.’
10개쯤 지나니 다리가 뻐근해지기 시작했고,
15개쯤 되자 공을 받을 때 착지가 조금씩 흔들렸다.
그래도 20개까지는 어떻게든 가자.
"20!" 파트너에게 외치고 공을 건내줬다.
파트너도 힘들어보였지만 잘 해내고 있었다.
너무 힘들었다.
시계를 슬쩍 보니 1시간 8분을 지나고 있었다.
"20!" 파트너의 할당량이 끝났고, 내 순서가 돌아왔다.
다시 나는 메디신볼을 들고, 한 개, 또 한 개, 타겟을 향해 던졌다.
간간히 뜨는 빨간화면과 카운팅 되지 않는 갯수는 이번 월볼에서 꽤나 큰 복병이었다.
다리는 터질 것 같았고 던질 때마다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정말 최선을 다했다.
우리는 두 번 정도 더 교대했다.
진짜 힘들었지만 그래도 점점 완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지막 15개."
파트너가 나에게 공을 건내주었다.
이 것만 하면 진짜 끝난다.
90....95.....99...
우리 뒤에 서 있던 심판이 노란색 깃발을 들어 골인지점을 가리켰다.
그 순간, 파트너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같은 마음으로 눈이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대로 골인 방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직선 구간을 향해 뛰는데
그 짧은 시간동안
머릿속에는 6개월 전 인천 대회에서 무너졌던 순간들이 가장 먼저 스쳤다.
실수하지 않아야 할 곳에서 실수를 하고, 제대로 준비가 되지도 않았던 터라 체력이 바닥나,
“어떻게든 완주만 하자”라며 서로를 다독이며 갔던 그 레이스.
그날 당했던 부상, 그 이후 재활과 고민,
그리고 토요일 아침마다 늦잠을 이겨내고 8시 30분 마다 진행했던 훈련들까지
모든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준비, 흔들림, 부상, 슬픔, 고민.
그리고 결정적으로, 딱 2주 전.
하이록스보다 훨씬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했던
춘천마라톤에서의 아픈 기억도 스쳐 지나갔다.
그날의 무력감과 실망,
그 감정까지도 지금 이 순간을 밀어주는 힘처럼 느껴졌다.
우리 둘 다, 지금 이 순간에는 그동안 쌓아온 모든 것들을 그대로 쏟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포효하듯 외치며 함께 골인 지점을 통과했다.
그 자리에 바로 주저 앉았다. 6개월의 마침표였다.
우리의 기록을 전광판으로 확인했다.
지난번보다 거의 13분이나 줄어든 기록.
첫 하이록스 때보다도 4분이나 빨라진 기록.
힘들었지만, 그 어떤 순간보다 뚜렷하게 성장한 6개월이었다.
나와 파트너는 일어나서 서로를 끌어안으며 기뻐했다.
"고생했어요."
"고생하셨어요."
기뻤다.
완주 단상을 내려오니 기다리고 있던 건 이제 우리의 기록을 남길 포토존 이었다.
물론 우리가 포디움에 올라갈 실력도 아니고, 누가 봐도 압도적인 기록은 아니다.
절대적으로 보면 이번 기록도 평범한 축에 불과하다.
하지만 하이록스든 마라톤이든,
이번에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숫자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포기하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버텼던 시간들,
서로에게 기대고 밀어주며 여기까지 왔던 수많은 순간들.
무너졌던 날도 있었고, 흔들렸던 날도 있었지만
결국 그 모든 것들이 이 1시간 10분을 만들어냈다.
6개월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힘든 날, 나아지던 날, 그냥 버티기만 하던 날.
하지만 결국 우리는 지난번의 실수를 이겨냈고,
우리가 원하던 방식으로 이 결승선에 여태 도전했었던
하이록스 레이스 중에서 가장 빠른 시간으로 다시 골인 했다.
기록은 숫자로 남지만, 성장은 매일의 선택으로 남는다.
우리의 6개월은 절대 헛되지 않았다.
이번에도 우리는 챔피언은 아닐지라도, 그 어떤 챔피언의 기록보다도 우리에게는 값진 시간이었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도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는 평범한 두 명의 직장인일 것이다.
Ep.4 끝, 에필로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