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스스로를 몰아넣지 않으면 나는 절대 내가 원하는 만큼 발전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땐 삶을 바라보는 잣대가 0 아니면 100이었다. 자의적으로 날이 선 긴장 상태에 나를 두고 이렇게 사는 게 잘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난 충분히 버틸 수 있다, 난 잘하고 있다, 스스로 세뇌하듯 되뇌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몸은 정직했다. 불면과 공황과 우울과 불안에 괴로워하며 열심히 병원을 드나들며 약을 타먹었지만 별 차도가 없었다. "의학적 치료를 계속 받으시기보단 심리상담을 시작해 보시길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몇 년간 다닌 병원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심리상담을 받아보기로 했다.
몇 회차 이후, 상담 선생님은 생각지도 못했던 지점을 짚어주셨다.
"이도 씨의 세상은 매분 매초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것 같아요. 나의 관점이 과연 백 프로 옳은 건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어요.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가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보면 어떨까요?"
오랜 경력의 심리 상담 선생님의 조언이었다. 네, 노력해 볼게요. 정답처럼 보이는 문장을 일단 입 밖으로 둘러대고 나왔지만 솔직히 와닿지 않았다. 여기서 계속 지고 밀리면 당신은 내 삶을 책임져줄 건가요? 나는 그렇게나 나를 낫게 해 줄 무언가를 찾아 헤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누군가의 진심 어린 조언을 담아들을 여유가 없었던 내 상태는 인지하지 못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다. 삶을 전투적으로 경계하며 살아오다가 더 중요한 것들을 아주 많이 놓치고 살아왔다는 것을 그 많은 일들을 겪고서야 알았다. 아니 사실 아직도 잘 모르겠다. 왜 이렇게 세상은 복잡하고 정신없고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마음은 왜 이리 변덕스러워서 알 수 없을까? 그래도 이제야 상담 선생님께서 알려주시고 싶으셨던 것이 무엇인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행운이다. 타인을(도대체 누구를?) 제쳐야만 내가 성공할 수 있다며 그동안의 나를 지탱해 오던 믿음이 얼마나 모래성 같았는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본다. 그냥 내 그릇이 딱 그만했던 것이다.
선생님의 말씀 그대로였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가치가 있었다. 삶을 살아가는데 단 하나의 정답만이 있지는 않다는 말이다. 80억 명의 인구만큼 80억 개의 가치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가치관을 인정하는 시작점은 먼저 스스로의 가치관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고 이를 왜곡 없이 받아들이는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머리로는 알겠어도 제대로 된 실천이 항상 가장 어려운 법. 스스로에 대해 적어보는데 스물아홉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걸음마조차 떼지 못한 신생아가 여기 있었다. 도통 나조차도 신뢰할 수 없는 내 속마음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단어들이 떼굴떼굴 굴러 나왔다. 작은 조약돌 같이 단단한 단어들이었다.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분에 넘쳤다. 그들에게 남아줘서 고맙다고 전하며 언젠가 우리가 연이 다하기 전까지 같이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보자고 말했다.
내가 오늘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은 사진첩을 돌다 발견한 문장 때문이었다.
'당신이 좋은 기분으로 지내는 것 이상으로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세상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퇴근길에 이 문장을 보자마자 헛웃음이 났다. 몇 년 전이었다면 머리가 참 꽃밭이라고 생각했겠지. 그런건 들장미소녀 캔디나 가능한거에요. 어떻게 늘 좋은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겠어요? 그 몇 년 사이 내가 닮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은 차갑고 건조한 현실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좋은 기분으로 돌보고 유지할 아는 사람들이 그 힘으로 타인들에게 좋은 기운을 나누어줄 수 있었고, 또 그 기운을 받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선순환을 만들 수 있다는걸 이제는 경험으로 안다. 좋은 마음을 통해 자신도 타인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었다. 밝은 힘은 어두움에서 온 힘보다 훨씬, 훨씬 더 건강하고 강한 힘이었다. 만화 속에서나 나오는 말이 아니라 실존하는 힘이라는걸, 정말 강하고 용기 있는 사람들이란 그런 사람들이라는걸 이제는 믿는다. 나도 만나면 기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만나면 좋은 친구 mbc 문화방송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이 기분을 잊지 않기 위해 글로 남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