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도 Mar 03. 2021

워커홀릭 엄마에게 핸드드립 커피란

시간을 밀도 있게 채우는 법

우리 엄마는 좀 워커홀릭이다. 적어도 내 눈엔 그렇다. 그녀는 일만 시작하면 흡사 인터넷에서 말하는 광공 재질이 되니까. 대한민국이 주 6일제였을 때 에잇투원으로 살았던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거의 노는 거라고 말하는 엄마지만, 곧 환갑이 가까워진 지금까지도 하루의 대부분을 책상 앞에 앉아 일하며 보내는 그녀를 볼 때마다 맘 속에서 조심스레 존경심이 든다.


하여간 젊었을 적부터 엄마는 일만 했다. 밖에서는 회사일, 집에서는 집안일. 뭐 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엄마를 보며 이모들은 슈퍼우먼이라 혀를 내둘렀다. 꼼꼼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에 필연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날카로움 덕에 어렸을 적엔 그녀를 많이 무서워했지만 어른이 되고 보니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엄마가 삶을 어떻게 버틸 수 있었을까 싶다.






그런 엄마가 커피를 배우기 시작했던 건 한 7년 전 즈음이었다.


매주 주말마다 엄마가 바쁘게 어딘가로 다니기 시작했다. 한 커피 클래스에 등록했다 했다. 매번 가기 전까진 세상 귀찮아하는 티가 역력했는데, 서너 시간 나갔다 돌아오면 놀이터에서 잔뜩 뛰어놀고 돌아온 아이처럼 엄마에게 생기가 돌았다.


매주 집에 새로운 커피 용품들이 생겼다. 이건 핸드드립퍼인데 공기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르면 원두가 신선하다는 뜻 이래! 이건 모카포트인데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기기래! 여름을 위한 아이스 전문 드립퍼에 학창 시절 과학실에서나 볼 것 같은 실험기구처럼 생긴 것까지, 온갖 신기한 도구들을 가져와 내려보는 엄마가 나는 신기하면서도 낯설었다. 늘 엄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엄마가 나랑 별 차이 없는 친구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늘 배운 내용을 복습해야 한다며 연습하는 엄마를 지켜보는 자식들에게 요모조모 설명을 하는 그녀의 눈빛은 세상 재밌고 궁금한 것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이런거 비스무레했음


그녀의 취미는 곧 본격화되어 전문가반에 들어갔다. 이왕 시작한 것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선언이었다. 커피를 내릴 때면 주말에도 예민하고 집요한 엄마로 돌아갔다.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커피 맛이 제대로 내려진다며 원을 그릴 때 손이 떨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번 숨을 참으며 커피를 내릴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몇 달 동안 쉬는 날을 꼬박 커피에 부은 엄마는 그 해가 가기 전 자격증을 땄다. 자격증을 따던 날, 액자에 고이 끼워 거실 옆에 세워두던 엄마의 복잡 미묘했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것은 단순한 뿌듯함이 아니었다. 제 삶의 시간을 주도적으로 끌고간 자들만이 가지는 선장의 위풍당당함 같은 것과,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차근히 버텨내고 채워넣은 자만이 가지는 자부심이 섞인 표정이었다.


그 날 저녁, 이모네에 놀러가 커피를 한 잔씩 내려주고 오는 길에 엄마는 주변인들과 맛있는 커피를 나눌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어느 순간부터 삶이 무력하게 흐르기만 했다는 그녀가 일생동안 함께할 수 있는 취미를 찾은 것은 정말 큰 축복이다.






이제 엄마에겐 분기마다 열리는 카페쇼에 가서 새로운 원두와 디저트들을 탐방하는 낙이 생겼다. 온 나라에서 온 원두들을 종류별로 내려보며 그녀는 자기 입맛에 맞는 원두집들을 찾아나가고 있다. 갓 내린 커피를 마실 때마다 엄청난 리액션을 하는 엄마를 지켜보면서 그동안 밖에서 커피를 마실 때 그녀가 별다른 리액션이 없었던 건 엄마가 자기 취향에 아주 까다로운 기준점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덩달아 알게 되었다.


본가에 가면 매일 열한 시쯤 오전 일과를 마친 엄마가 커피를 갈기 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라인더도 꼭 수동만 고집한다. 언젠가 한번 엄마를 도와 커피를 갈았을 때 그 일이 너무 수고스럽게 느껴져서, 자동으로 갈면 더 편하지 않아? 하고 물었던 적이 있다. 엄마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커피를 갈면서 시간이 여유로이 흘러가는 것을 즐기는 것이 당장 몸이 편한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커피를 직접 가는 게 더 좋다니? 심지어 요즘엔 알아서 커피를 내려주는 자동 드립퍼도 있는데 효율적이고 몸 편한 게 가장 좋은 거 아닌가? 싶었던 때도 있었더랬다. 20대 후반에 접어드는 지금에서야 그건 자신의 결대로 시간을 밀도있게 채우는 법을 안다는 뜻임을 깨닫게 된다.






시간을 헐랭하게 보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뭘 해도 시간이 더디게 흐르고, 그 무엇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밍숭 하게 하루 하루를 흘려먹는 것 같을 때. 그것은 내가 희미해지고 있다는 분명한 신호다. 그런 날엔 어김없이 엄마의 커피가 생각난다. 그녀의 커피를 마시면 카페인 충전용 커피를 마셨을 때와는 다르게 온갖 방면으로 정신을 번쩍 세워주는 맛이 나니까.


그녀의 커피엔 그런 힘이 있으니까. 오랜만에 엄마가 내려준 커피를 마시고 싶다. 맛있는 원두를 사들고 엄마 집에 놀러 가야지.

이전 06화 사과맛 풍선껌처럼 당차게 살고 싶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