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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도 Mar 22. 2021

지하철에서

퇴근길이었다. 늦은 시각,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에너지 넘치는 두 남녀의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먼저 듣고 싶어서 들은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고 싶다. 어찌나 즐거우신지 끊이지 않는 티키타카에 까르르르 하는 웃음소리에, 이어폰의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말짱 도루묵이 될 정도였는걸. 밤 10시가 넘은 시각에도 뿜어져 나오는 그 엄청난 기력에 도대체 뭐가 그리 재미지신가 귀를 열지 않을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변호하고 싶다.


아무튼 그들은 노약자석에 앉아계시던 백발의 두 어른이었다. 그들의 관계가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었으나 그 일련의 애정행각들로 미루어 보아 아마도 연인 혹은 그 이상이시겠거니 추측할 뿐이다. 그렇게 나는 집에 돌아오는 길 내내 멀찍이 앉아 들려오는 그들의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어느 특정한 나잇대를 지나면 노인이 되는 것이 인간 삶의 섭리라면 그동안 내가 만났던 노년기에 접어든 사람들의 에너지는 뭐랄까, 해가 다 저문 시간대의 식물들과 비슷했다. 그런데 노약자석의 그 두 분은 조금 달랐다. 생동감이 마구 넘쳐흘렀다.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의 식물들 같았다. 저 연세에도 저렇게 어린아이처럼 개구지게 행동하실 수가 있구나! 하는 것에 노년기에 대한 나의 편협한 고정관념이 하나 부서졌고, 저 연세에도 이십 대 초반 첫 연애를 하는 사람들처럼 저렇게 설레는 표정으로 온 애정을 담아 깨가 뚝뚝 떨어지는 것처럼 표현하며 살 수가 있구나! 하는 것에 또 한 번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가장 놀랐던 대목은 이 부분이었다. 어느 지점에서 또 서로 박장대소가 터져 한참을 웃으시던 도중, 할아버지가 갑자기 할머니를 와락 안으시고선 경쾌한 트럼펫처럼 말씀하시는 것이다.


"야, 나는 우리 순자 씨를 만나고 하루하루가 새로와!

아주 세상을 처음부터 다시 사는 것 같아!"






몇 년 전 만난 한 친구가 있었다. 주기적으로 만나 근황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면 그녀는 늘 더 이상 세상에 알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없는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 역시 앞으로의 삶에 이미 지쳐버렸다는 그녀의 말에 조용히 공감하던 시절이었다. 우린 서로의 무기력함의 근원을 찾기 위해 이런저런 대화들을 나눴던 기억이 있다.


아직  젖살이 빠지지 않았지만 이미 시들어버린 눈빛을 가졌던 이십  초중반 시절의 내가 모든 것들이 새롭게 느껴진다는 주름진 눈가를 마주한다.   자에 기운  , 삶의 기운,  원천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김연자 선생님의 아모르파티가 갑자기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가사의  구절처럼 진정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한다. 어린아이들이 떠오른다. 새로운 것을 찾았을 때 그들의 눈빛과 신기해하며 하나하나 배워나갈 때의 그 흥미진진한 표정, 재미난 것을 찾아 즐거이 놀 때의 기운 같은 것들 말이다. 혹은 노년의 학자들이 자신들의 연구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터뷰 영상들이나, 제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생생한 목소리나 제 직업군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눈빛도. 그곳에는 언제나 별이 떠있다.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모든 표현들에는 생의 기운이 물씬 돈다. 그래 저것이 생기의 원천일 수도 있겠구나. 끊임없이 자신이 관심 있는 것들을 찾아가려는 호기심과 깊이 알아가려 하는 탐구심.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원천인 사랑. 세상을 사랑하는 법과 사랑받는 법을 잃지만 않는다면 언제가 되었건 한낮의 식물들처럼 생생히 살아갈 수 있는 것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을 해보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순자 씨가 부러워졌다. 아니, 그녀 덕에 세상을 새로 사는 것만 같다는 할아버지가 더. 솔직히 그냥 두 분 다 부럽다. 마음을 쏟을 대상을 찾으셨다는 것이 말이다. 요즘엔 무엇이던 도처에 널려있어 뭐든 금방 손에 잡히는 것만 같으면서도 정작 진심으로 체화되는 것은 몇 안 되는 것 같다. 어찌 됐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잔뜩 들뜨신 목소리가 그런 귀한 인연의 반가움을 대변해주는 것만 같았고 두 분의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는 이야기. 두 분께서 오래오래 좋은 시간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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