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라떼인가 우유인가
남미를 떠돌 때의 일이다.
아무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이 벌써 3주차에 접어들고 있었다. 좋은 인연들을 만난 덕분에 얼떨결에 마추픽추도 다녀오고 태양의 섬에 우유니 사막까지 다녀오게 되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알찬 시간을 보냈으니 이젠 조금 쉬어가야겠다고 느꼈다.
어딜 가면 좋으려나. 페루 남부, 오아시스로 유명한 이카라는 도시에서 다음 행선지를 고르고 있었다. 호스텔에서 만나 함께 저녁을 먹던 언니가 '쿠엥카'라는 도시를 소개시켜줬다. 미국에서 은퇴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로, 상대적으로 물가가 저렴한 에콰도르로 내려와 남은 여생을 보낸다고 했다. 크게 특별할 건 없지만 다른 곳들에 비해 치안이 좋고 평화로운 작은 동네라고. 언니 지금 저는 그런 기운이 필요해요! 시원시원한 입매를 가지고 있던 언니는 푸하하 웃으며 너 곧 올라가겠네, 하고 말했다.
에콰도르 남부에 위치한 쿠엥카로 넘어가기 위해선 일단 페루 북부로 가야했다. 국경 근처 도시 중 하나인 피우라로 올라가 그 곳에서 하루에 두 번 운행 한다는 에콰도르 행 버스 티켓을 끊었다. 출발 전까지 할 일이 없어 동네를 휘적거리다 터미널 근처 까페를 발견했다. 죽치고 앉아있으면 되겠다. 나는 까페라떼 한 잔을 주문하고 한량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바리스타가 이윽고 내어준 라떼는 희한한 모습이었다. 온기가 살금살금 올라오는 커다란 머그잔에 가득 찬 따뜻한 우유와 카누 미니와 비슷한 인스턴트 커피 하나였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이것을 라떼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정도면 커피향 첨가가 아닌가. 99퍼에 1퍼정도면 우유라고 부르는게 조금 더 맞지 않나 생각했지만 아무튼 이것은 이 까페에서 파는 까페 라떼였다.
그래, Latte(우유)는 라떼네. 희미한 커피 향이 나는 말간 베이지색 음료를 마시면서 여행 중엔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었던 고정 관념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 틀이 와장창 깨지는 일을 참 많이 겪는다고 생각했다.
사물의 이름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어느 범위 안으로 빠르게 분류시키고 쉽게 인식하기 위해 붙인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공통적으로 합의하고 받아들일수만 있다면 이름이 무엇이냐는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이 아닐 것만 같다. 당장 이 라떼만 봐도 그렇다. 우유 향이 더 많이 나는 커피일 수도 있고, 커피 맛이 슬쩍 나는 우유라고도 얘기할 수 있다.
보통 스스로를 괴롭히던 지점은 이런 부분이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석될 수 있는 기로들. 명확하게 스스로를 규정시키기를 바랬던 시점에서 그 모호함이 너무 싫어서 나는 이런 사람이야! 하고 부주의하게 내뱉었던 말들이 떠올랐다.
스스로가 그은 그림에 스스로를 집어넣기 위해 몸을 구기며 괴로웠던 나날들을 떠올린다. 얘야, 어디서부터 어디께까지가 나인지 이 나이 되도록 잘 모르겠으니 그냥 그 때 그 때 느껴지는대로 사는 것이 맞는 것 같다- 라고 말씀해주신 한 어른의 말씀이 떠오른다. 큰 바다에 떨어뜨려지는 물감들처럼 쉼없이 퍼져나가는 그라데이션의 향연이 사람이라면. 끝없이 변화하는 것이 생이라면. 이름이 무엇이 중요하리, 단 일 미리의 오차도 없이 모두가 납득할만한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가능할 일일까 싶었다.
이유 모를 울렁거림이 심한 날일수록 명확함에 대한 집착이 심해진다. 이런 날엔 그 곳에서 만난 99:1의 까페라떼가 필요하다.
솔직히 맛은 그동안 마셔봤던 까페라떼 중 최악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라떼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의 충격, 내가 아는 라떼의 정체성이 부서질 때의 당황스러움, 찰랑찰랑하게 채워진 따듯한 우유 위에 얼마 되지 않는 커피 가루가 슬금슬금 퍼져가며 녹아내리는 걸 바라보았을 때의 어이없음이 필요하다. 그런 음료를 한 잔 마시고 나면 그래, 이것도 라떼라면 라떼지 하며 반드시 이정도는 되어야만 한다는 규정지음을 내려놓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꽉 붙잡고 있던 어느 선 같은 것들이 와장창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며 허탈하게 하하 웃곤 털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내가 깨어지던 시간들이 너무너무 그립다. 요즘 나는 진심으로 그런 여행이 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