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로시의 회상',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어른제국의 역습
이 세상에서 나만큼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내가 '나'로서 살아가게 만들어주는 건 기억이다. 내가 살아온 기억 말이다. '나'라는 책의 주제가 나의 기억인 셈이다. 사람은 첫 번째 기억으로 보통 2~3살 정도의 기억을 파편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한다. 내가 가진 첫 번째 기억은 돌잔치다. 돌잔치에서 막 뛰어다니던 기억이 난다. 돌잡이 때 연필로 공책에 내 이름의 끝 글자인 '훈'을 적었었다. 아마 그때는 '훈'을 쓸 줄 몰라서 계속 '혼'이라고 적었던 것 같다. 공책에 뭘 자꾸 끄적였던 기억이 드문드문 남아있다. 어머니가 나를 안고 있는 채로, 앞에 있는 사진기를 쳐다보라는 말을 끝까지 안 들으면서…
2007년 5월에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11살이었을 때다. 무슨 상황인지, 내가 뭘 해야 하는 건지 몰라 그냥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했었다. 손님들 오시면 인사하고, 영정사진 들고 화장터까지 가고. 고모가 차마 못 보여주겠다고 뒤에 있는 의자로 데려가 분골 장면을 보지는 못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오열하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러고 바로 집에 왔었나? 그것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에는 어리기도 했고, 그저 덤덤하게 지나갔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자식인 건지, 나이를 먹으며 아버지가 그리워지는 순간이 생겨났다. 고등학생 때였나, 무심코 집 책장에서 오래된 책을 꺼낸 적이 있다. 하도 햇빛을 많이 받아 표지가 다 바래고 속지는 노랗게 된 그런 책 말이다. 책을 펴니 첫 장에 볼펜으로 휘갈겨 쓴 편지가 하나 있었다. 아버지의 편지였다.
지금이야 괜찮다. 슬픔의 농도가 많이 옅어졌다. 세월이 그만큼 흘렀기 때문이며 그만큼 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내게 와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잠깐이나마 뵐 수 있게 해 준다고 하면,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할 생각이다. 아버지가 보고 싶지 않은 건 아니다. 여전히 보고 싶고, 그립고, 못다 한 말이 많으며 당신이 떠난 뒤에 이렇게나 잘 살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그동안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러나 나는 그 이후가 두렵다. 겨우 망각했는데, 겨우 희석되었는데… 처음에는 반갑겠지, 대화할수록 즐거울 거야. 그리고 다시 영원히 헤어져야 하면 슬퍼지겠지며 다시 짙어진 그리움을 세월에 흘려보내야겠지. 그걸 다시 겪고 싶지는 않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어른 제국의 역습’이다. 다시 20세기로 돌아가기 위해 음모를 꾸미는 켄과 자신이 태어난 21세기에서 살고 싶어 하는 짱구. 그리고 20세기에 물들었다 다시 미래로 나아가고자 고군분투하는 신형만, 봉미선의 이야기… 그 속에서 나는 신형만과 봉미선에 시선이 갔다. 시간이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다가 그들이 만난 건 자신을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는 '20세기의 냄새'였다. '20세기의 냄새'를 맡고 추억에 잠긴 그들은 짱구와 짱아를 잊고 그들만의 세계에 갇히지만 짱구가 가져온 신형만의 발 냄새를 맡게 된다.
신형만의 발 냄새. 그가 20세기를 넘어 21세기로 달려갈 때 남은 흔적, 전리품. 그가 냄새를 맡고 정신을 차리며 ‘히로시의 회상’이 시작된다. 어릴 적 아버지 등에 업혀 자전거를 타던 기억. 그리고 스스로 자전거를 타게 되고 만난 첫사랑. 첫사랑의 아픔을 잊게 해 준 봉미선과의 만남. 상사의 꾸중 속에서 그를 버티게 해 준 짱구의 탄생. 새롭게 지은 집으로 이사하던 그날의 기억. 뜨거운 여름을 버티게 해 준 짱아의 탄생과 야근 후 집에 돌아와 먹는 한잔의 맥주. 그 모든 것을 딛고 이제는 자신이 아버지가 되어 아들을 등에 업고 자전거를 타는 기억까지… 회상을 끝내고 울음을 터뜨린 신형만은 미래를 되찾기 위해 일어선다. 그리고 그들이 붙잡혀있던 ‘20세기 마을’을 도망치며 이렇게 말한다. “젠장! 이 마을은 왜 이렇게 그립고 정겨운 냄새가 나는 거야…”
사람은 기억의 집합체라고 한다. 좋은 기억, 행복한 기억, 슬픈 기억, 아픈 기억… 이 모든 게 모여 한 사람을 완성한다. 그리고 삶이라는 게 마냥 좋은 일만 있지는 않다. 드문드문 아픈 일이 반드시 있다. 누군가의 삶에는 아픈 일로 가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두들 살아간다. 신형만은 그리운 기억을 딛고 일어나 미래로 나아간다. 모두 흘러가는 삶 속에 기억을 흘려보낸 결과다. 어떤 기억이던 씻겨 내려간다. 좋은 일도, 슬픈 일도. 그래서 돌아봤을 때 처음 겪었던 것처럼 그렇게 강렬한 기억은 거의 없다.
어찌 보면 치료다. 세월의 흐름이 과거의 아픔을 치료해준다. 그리고 그 흐름이 가져온 새로운 추억은 사람이 사람답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오늘 상사한테 혼난 건 훌훌 털어버리고 내일을 살면 된다. 가슴 아픈 이별의 순간도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끝내 희석되어 나중에는 웃으며 ‘그땐 그랬지’ 할 수 있는 술안주가 된다.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지금은 아프지만 결국 괜찮아질 거라고. 어쨌든 내일은 올 테고 10년 뒤의 나는 이 일은 아마 기억도 잘 못할 거라고. 결국, 잊으면서 어른이 되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