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에 대하여_

'Beacon', Asami Tono

by 레드오렌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살짝 비틀면 숨어있던 감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수줍게 다가온다. 돌아보는 우리의 시선에 깜짝 놀라 도망가기도 하지만 가만히 앉아있는 우리의 옆에 조용히 기대 긴 밤을 함께 보내기도 한다. 감성은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기 전에는 살아있지 않다. 우리가 그들을 관찰하고 바라볼 때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가 된다. 있을지도 모르는 우주 저편에 사는 외계인의 눈빛이 아니라,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 우리 인간의 시선이 그들에게 생명을 부여한다. 바라보면서 비로소 존재하기에 우리가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그들을 살아있게 할 수 없다. 그들은 우리 인간이 가장 처음으로 창조해낸 존재다.




느끼는 그대로의 모습에 살짝 그림을 그려내면 감성이다. 바라보건대 밝은 그곳에 곧은 방사형 직선을 몇 개 그려내면 그것이 감성이다. 듣건대 아름다운 음악의 끝에 절절한 소감을 나지막이 내뱉으면 감성이다. 맡건대 그리운 향기가 코 끝을 감돌 때 추억을 회상하면 감성이다. 이성적으로 바라본 세상을 그림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감성이다. 부자로 만들어 주지는 못하지만 삶을 메마르지 않고 촉촉하게 유지시켜준다.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삶을 그 자체로, 어떤 곳에 숨어있는 감성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 그 자체로 의미 있게 한다. 거창하고 화려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소박하고 조용한 곳, 감성은 그곳에 살고 있다.


사랑 노래의 가사를 가만히 읽어본 적이 있는가. 이걸 현실에서 그대로 행한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내 얼굴이 다 붉어진다. 가령, 술에 잔뜩 취한 채 떠난 연인에게 걸리지 않는 전화기를 붙잡고 울고 있다던가 연인의 친구에게 자신이 그녀를 사랑했다고 말해달라는 것들. 혹시나 내 친구가 그러고 있다고 생각하면 당장 가서 말리고 싶은 그런 행동들이다. 그러나 멜로디에 실리면 참 아름답고 가슴 아픈 사랑 이야기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는 숨어있던 감성이 멜로디를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에 감성이 녹아들면 나도 모르게 젖어들고 만다.


그래서 쓰고 있는 대부분의 글에 감성을 숨겨둔다. 글이야 말로 감성을 숨기기 가장 적절한 곳이다. 글은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다. 눈 내리는 설원의 풍경부터, 타오르는 햇빛으로 작열하는 사막까지. 혹은 풍부하게 울려 퍼지는 밴드의 악기 소리부터, 단조로운 한 가지 악기로 연주되는 조용한 클래식까지. 독자들은 문장을 읽어나가며 그곳을 상상하게 된다. 유려하게 꾸며진 문장을 읽어나가며 자신이 마치 그곳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노래 가사가 그렇다. 내가 그 가사의 주인공이 된 듯하여 헤어진 연인을 붙잡고 싶어 하는 마음에 쉽게 공감한다. 거기에 살짝의 스파크, 멜로디를 터뜨리면 숨어있던 감성은 금세 독자의 마음속에 침투한다. 어떤 때는 공감을, 어떤 때는 위로를 주면서.




"황홀하게 울려 퍼지는 아름다운 멜로디 같이 호젓한 어둠의 나래가 약속이라도 한 듯 찾아들고, 이름 모를 산새들이 보금자리를 찾는 초저녁, 어느 이름 모를 소녀가 동쪽으로 사라진답니다. 아마도 자기 짝을 찾았기 때문이겠죠. 지금쯤 은하수에 조각배를 띄워놓고 단둘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며 멀리 저 멀리 행복의 보금자리로 노를 저어 갈 거예요'


우연히 접한 80년대에 쓰인 어떤 남자의 연애편지의 첫 구절이다.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연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 쓴 이 편지는 여타 읽어본 어느 문장들 보다도 아름다웠다. 문장 하나하나에 감성을 꾹꾹이 눌러 담은듯한 문체가 아름답다. 숨어있는 감성이 당장이라도 모습을 드러낼 듯한 문체가 아름답다.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받은 사람의 기분은 어땠을까. 감히 상상할 수는 없지만 보낸 이의 진심이 절절히 느껴지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오글거린다, 부담스럽다 라는 단어로 숨어있는 감성을 죽여버릴지 모르겠으나 나는 여전히 이 편지에서 시대를 초월한 설렘을 느낀다.


언제부터인가 감성을 표현하는 것을 '감성충', '오글거림'으로 깎아내리는 사회 풍토가 조성되고 있다. 그러한 사회의 변화를 마냥 비판하지는 않는다. 제3자가 바라보았을 때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 당장 이런 글을 쓰는 나도 옛날에 유행했던 드라마들의 대사를 볼 때면 손발을 제대로 펴지 못한다. 그러나, 알아줬으면 한다. 우리는 결국 관찰자 입장이라는 것을. 숨어있는 감성을 꺼내어 생명을 불어넣는 것은, 그리고 그 감성과 새벽을 보내는 것은 결국 생명을 부여한 그 사람의 몫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결코 그 감성을 온전히 다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아름다움이 오글거림으로 폄훼되어가는 세상이 아쉽다. 세상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원하는 것이 있다면 잃어버린 낭만, 잃어버린 감성의 가치가 되살아 나는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삶 곳곳에 숨어서 수줍게 나올 때만을 기다리고 있는 감성이라는 존재들은 영원히 그 안에 숨어있기에는 너무나 값지고 소중한 것들이다. 단순히 오글거림이라는 단어로 이들을 표현하기는 너무나 모욕된다. 이 세상에서, 이 우주에서 이들에게 생명을 부여할 수 있는 건 우리 인간뿐이다. 우리가 가진 이 능력이 폄훼되지 않고 영원히 남아 감성을, 이 아름다운 세상을 좀 더 느낄 가치가 있는 곳으로 만들기를 소망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눈에 대하여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