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 대하여_

'Stand by Me‘, Ben E. King

by 레드오렌지

산길을 운전하던 중이었다. 앞 유리창에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더니 이내 쏟아져 내렸다. 화창했던 날씨가 한순간에 폭우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곳은 국도, 잠시 갓길에 차를 대고 빗소리를 듣는다. 시트를 뒤로 젖히고 투둑 투둑 천장을 때리는 빗방울에 집중한다. 창문을 여니 물 묻은 풀 향기가 진하다.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들의 와이퍼가 분주하다. 차 유리에 맺힌 빗방울이 하나 둘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본다. 가까이 가서 풀내음에 젖어들고 싶지만 비를 맞고 싶지는 않아 참는다. 이내 햇살이 들어오고 창문에 맺히는 빗방울이 줄어든다. 비가 그쳤다.




비를 참 좋아한다. 한없이 맑고 푸르던 하늘에, 뜨겁게 내리쬐던 햇빛이 차츰 사라지고 천천히 드리우는 먹구름. 왠지 모르게 차가워지는 바람, 갑자기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 더위를 해소해 주는 것으로도 비는 충분히 그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비가 몰고 오는 그 이형의 분위기를 더 좋아한다. 하늘이 어두워지며 세상의 변화를 인지하게 되는 그 순간의 분위기가 그렇다. 빗방울이 만드는 소리는 그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한두 방울에 집중하다가 이내 수십, 수백만의 빗방울 소리가 겹쳐 그 자체로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 낸다. 어떤 때에는 투둑 투둑 거리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추적추적 거리며…


비는 내리는 곳에 맞게 분위기를 자아낸다. 아스팔트 길거리에 내리는 비와 흙바닥에 내리는 비가 만들어 내는 내음은 다르다. 풀숲에 내리는 비와 바다에 내리는 비 또한 그렇다. 비릿함, 향긋함, 달콤하며 습한 그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비 내음을 좋아한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맑고 깨끗한 분위기를 준다는 것이다. 세상의 먼지를 모두 씻어주는 그 비는 상쾌하고 개운한 공기를 남기고 떠난다. 강의 물은 더 맑아지며 길바닥에 소복이 쌓여있던 꽃가루들도 빗물에 섞여 이내 그 흔적을 감춘다. 비는 그 자체로 장르가 되기도 한다. 한없이 쏟아지는 폭우는 그 자체로 재난영화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나오는 폭우 장면처럼, 한도 끝도 없이 내리는 비는 자연 앞에서 인간의 무력함을 깨닫게 한다. 비는 로맨스 영화의 키워드가 되기도 한다. 영화 ‘노트북’을 관통하는 하나의 배경은 바로 ‘비’다. 영화 속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은 갑자기 내리는 폭우 속에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한다. 어두운 골목길에 내리는 비는 정반대다. 아무도 없으며 무언가 음침하고 귀신이 나올것만 같은 곳에서 내리는 비는 그 자체로 공포영화 아니던가.




학창 시절에는 비를 싫어했었다. 특히 등굣길의 비를 정말 싫어했다. 첨벙첨벙 물 웅덩이를 밟으면 어제 산 운동화가 흠뻑 젖었다. 교복 바지는 밑단부터 젖었으며 우산 끝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젖어오는 어깨에 더하여 강한 바람 때문에 자꾸만 뒤로 젖혀지는 우산 살이 싫었다. 겨우 학교에 도착해서 열어본 가방에는 젖어있는 책까지… 평소에는 걸어 다니던 등굣길을 비가 오는 날이면 굳이 버스를 탔으며 사람 많은 버스에서 겨우 흔들거리는 손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버티고 서있는 그 축축한 분위기가 너무도 싫었다. 그렇게 등교를 하고 나면 에어컨도 잘 안 틀어주던 그 시절의 교실은 30명의 반 친구들이 선풍기 하나에 의존하여 옷을 말리고 있었다. 분명 기온은 낮은데 땀이 흐르는 그런 상황이었다. 운동장에 나가 캐치볼을 못하게 되었다는 사소한 이유도 있었다. 축구를 좋아하는 친구들이야 비가 오건 말건 아랑곳 않고 공을 차고 있었지만 캐치볼이라는 게 비 올 때는 당최 할 수가 없는 운동인지라…


지금은 비를 다시 좋아한다. 비가 오면 시끄럽던 거리가 조용해지고 그저 빗방울 추적이는 소리만 들려온다. 그 소리는 들떴던 감정을 가라앉히고 생각에 잠기게 한다. 천천히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는 그런 순간의 환상을 좋아하게 되었다. 뭐 학창 시절처럼 운동화를 신고 출근할 일도 없고, 요즘에는 대부분의 건물에 선풍기보다는 에어컨으로 냉방을 하기에 몸으로 습기를 느끼지 않는다는 시대의 변화가 존재하는 것도 있지만. 몰입이라고 할까, 비 오는 순간에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에 더욱 몰입하게 된다. 화창한 날에 글을 쓰고 있으면 자연스레 바깥 풍경에 눈이 간다. 저 멀리 해안가에서 서핑하는 사람들, 길 걷는 사람들에 자꾸만 한눈이 팔리지만 빗속에서는 다르다. 밖에 아무도 없으며 그냥 그 순간에 내 세상에는 글을 쓰고 있는 나만 존재하기에.


비에 어울리는 음악까지 곁들여주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그때그때 꽂히는 노래를 듣곤 하는데, 요즘은 드라마 ‘그해 우리는’의 ost를 많이 듣는다. 애초에 드라마 분위기가 워낙 비에 잘 어울려서일까? 그중에서도 이승윤의 ‘언덕 나무’를 가장 좋아한다. 극 중 갑작스럽게 쏟아져 내리는 비에 당황하는 여주인공에게 남주인공이 우산을 씌워주러 오는 장면에 삽입된 노래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사랑 때문에 생긴 쓰라린 상처, 항상 기억에 남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담은 그 가사에 너무나 공감된다고 할까. 비 오는 날에는 이 노래를 듣고 있으면 그 분위기에 취해 이것저것 추억에 잠기곤 한다. 잘하지도 못하는 캘리그래피를 한답시고 가사를 끄적이기도 하였다.


언덕나무 캘리그라피


운전 중에는 우울한 음악도 찾게 된다. 축 처진 분위기에 취해버리는 것이다. 그때에는 비 올 때 가장 생각나는 가수 중 하나인 에픽하이의 노래가 대체로 떠오른다. ‘우산’이라던지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라던지, 에픽하이 특유의 분위기가 살아있는 음악이 많다. 오죽하면 장마철에는 ‘우산’이 울려 퍼지지 않는 카페가 없을 지경이다. 난 그중에서도 ‘빈 차(Home is far away)’를 좋아한다. 인상적인 오혁의 후렴구도 좋지만, 노래 전반에 깔려있는 분위기와 가사가 마음을 울린다. ‘내게 요구되는 건 늘 높게 뻗은 두 손보다 조금 위. 세상의 눈높이, 갈수록 에버레스트’ ‘내가 해야 할 일, 벌어야 할 돈 말고도 뭐가 있었는데. 내가 가야 할 길, 나에게도 꿈같은 게 뭐가 있었는데.’ 사랑 이야기도, 꿈 이야기도 아닌 그냥 지금 현실을 담담히 풀어내는 가사에 매력을 느낀다.




2020년 괌에 내린 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순항훈련 중 괌에 있는 갭 갭 비치에 방문한 적이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전 세계가 봉쇄되고 있던 중 우리 순항훈련전단이 유일하게 육지에 내려 여유를 즐긴 기항지였다. 소양함에 승조하여 괌에 도착한 우리는 가득 들떠 선크림을 바르고 체육복 안에 수영복을 입은 채 갭 갭 비치로 떠났다. 제주도에서 출항하여 근 한 달 정도만에 밟은 땅이었기에 더욱 설레었다. 각자 모여 숯에 불을 피우며 고기 구울 준비를 하였고 준비된 음료를 마시며 풍경을 즐겼다. 준비운동을 마친 사람들은 하나 둘 물속으로 뛰어들기 시작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바닷물이었지만 그렇게 짜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하나 둘 물속에 모여 눈앞에 보이는 물고기 한 마리를 잡으려고 협동작전을 펼치기도 했다.

갭갭비치 - 미국령 괌


그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중, 갑자기 비가 왔다. 정말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나 맑던 풍경은 이내 안개 낀 듯 어두워졌으며 열대 휴양지의 열띤 분위기는 금세 차분해졌다. 사람들은 나무 혹은 파라솔 밑으로 들어가 비를 피했다. 처음 겪어보는 열대지방의 ‘스콜’이었다. 빗방울은 또 어찌나 굵던지… 그때 비로소 내가 있는 이곳을 느낄 수 있었다. 중력에 이끌려 땅을 바라보고 있는 나뭇잎이 눈에 들어왔다. 비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용케도 나뭇가지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바다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바닷물인데도 그리 짜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 정말 정신없이 내리는구나. 지구가 아니라 저 멀리 외계행성에 있는 그런 기분이네. 공기는 시원하고 빗방울은 차가웠으며 바닥은 이미 물이 한가득이었던 그때의 스콜, 비는 잊지 못할 것 같다.

갭갭비치의 스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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