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서 생긴 일#4. 우붓에 뭐가 있는데요?
제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게 참 어렵다고 느낍니다.
원하는 걸 쫓으면 되는 게 인생인 것 같지만 대체 뭘 원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사실 안 한다고 죽을 것 같은 일은 없어서요. 여기서 오는 무력감은 십 대의 어느 순간부터 무거운 그림자처럼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무언가를 아직 찾지 못했다는 의식이 마음을 옥죄었습니다. 그럴 때면 평생이 주어졌다 생각하며 마음을 다독였습니다. 한데 또 현실을 생각하면 건강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동안 찾아야 할 텐데, 다양한 변화가 허용되는 청춘 안에서 찾아야 할 텐데... 하며 조바심을 느낍니다.
저는 파랑새를 쫓듯 늘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미 현재의 자신에게서 평화를 찾은 사람들이 부럽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을 호주에서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이를 테면 호주의 카페에선 한국에서 보지 못한 유형의 고객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온 것도 아니고, 노트북 작업을 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닙니다.
이들이 카페에 와서 하는 일이란, 커피를 홀짝이며 허공을 바라보다 가는 것입니다.
매일 해 질 녘이면 카페에서 지는 햇볕을 맞으며 '현재'와 호흡하고 있는 사람들.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일상 속에서 시간이 흐르는 결을 느낀 게 언제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유치원을 다닐 땐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습니다. 억겁의 실을 천천히 풀어내듯 느릿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등지고 그림을 그리다가 햇볕이 굴절되며 만든 무지개를 발견해 손톱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만지작거리던 시절은 영원에 가까운 시간이었습니다. TV에서 어른들이 수십 년의 세월을 언급할 때면 대체 나는 언제 열 살이 되는 걸까 생각하면서요.
초등학생 땐 하늘을 꽤 자주 올려다보며 구름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엄청 느린데 또 그 느림이 꾸준히 지속되니 빨라서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터널 속으로 들어간 급행열차처럼 기억이 온통 까맣게 뭉뚱그려지다가 고등학교를 가기 전 잠깐 터널을 빠져나오던 중3 어느 가을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삼 년 간의 내신이 모두 끝나고 친구들과 하천 변을 걷던 어느 늦가을의 오후. 저희는 떨어지는 낙엽을 잡겠다고 폴짝이고 있었습니다. 조금만 성급하게 뛰면 너무 빨라서 놓치고, 너무 기다리면 또 늦는다는 감각을 익히며 점점 가을이 지는 속도에 맞춰서 걷고 허공 위로 뛰어올랐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선 운 좋게 지하철이 해 질 녘의 한강을 지날 때 잠시나마 창 밖을 바라보며 현재가 가고 있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물론 주어진 환경이 다른 요소가 크겠지만, 비단 외국만의 사례는 아닌 것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미 제 자리에 있는 퍼즐 조각 같습니다.
아직 제 자리를 찾지 못한 퍼즐들은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맞지 않는 자리에 몸을 끼워 맞춰보지만 뭔가 불편합니다. 내 모양이 문제인지 틀이 문제인지 궁금해하며. 그냥 안주해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자신과 흡사해 보이는 다른 퍼즐들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보고 조바심과 무력감을 느낍니다.
이들은 주변인들과 대화도 해보고, 책을 읽고 여행을 떠나거나, 업을 바꾸거나, 혹은 사는 나라를 바꾸기까지 하며 마음의 평화와 균형감을 찾아 나섭니다.
우붓은 그렇게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장기 투숙하며 라이스 테라스를 걷다가 채식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요가나 명상을 하는 사람들. 가장 대표적인 요가센터인 요가반(Yoga barn)의 경우, 울창한 숲 속에 채식 식당과 카페, 숙소까지 함께 갖추고 있으며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각종 요가와 명상 클래스가 이어집니다. 요가반의 숙소는 이미 예약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이들처럼 마음의 평화를 찾아볼 요량으로 숙소에서 받은 지도에 표시된 숲 길을 찾았습니다. 푹푹 찌는 열대의 공기를 머금고 하늘을 뚫을 기세로 자라난 야자나무와 무성한 정글 속을 걸었습니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숲길을 걷다가 송아지도 만났습니다. 잠시 주스를 마시며 쉬고 있던 정자에 앉아있자니 휴대폰으로 한국 드라마를 소리가 들렸습니다. 꽤나 진지하게 몰두해서 보는 모습에 아는 드라마인가 귀 기울여 보았지만 알 수 없었습니다. 발리 한가운데 우붓에서, 걷고 또 걸어 숲 속 마을 깊숙이 들어와서까지 들리는 한국어가 새로웠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인 것 같습니다. 마음 한편에서 좀 허전하다고 느낀 게. 이렇게 아름다운 걸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몽글몽글 들기 시작했습니다.
요가반에도 가보았습니다. 몇 달이고 상주하며 요가 예찬론에 빠진 분들 틈에 껴서 구부정한 몸을 이리 꼬고 저리 꼬며 버텼습니다. 돈 내고 고문받는 것 같다는 기분을 애써 떨쳐내며 밝은 에너지로 빛나는 강사님을 열심히 따라 했습니다. 주위를 휘휘 둘러보며 다들 이 고통 속에서 대체 어떻게 평화를 느끼는지 아리송했습니다. 몸이 편해야 마음도 편한 거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만 드는 걸 보니 이 것도 지금 갈 길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원숭이들이 뛰노는 정글 숲길을 걸으며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아무래도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조용하고 평화로운 홈스테이를 떠나 친구들을 만나기 좋다는 호스텔로 숙소를 옮겼습니다. 비슷한 가격에 깨끗하고 넓은 개인실에서 굳이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서 부대끼는 불편을 감수한다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일단 갔습니다. 어쨌든 지금 원하는 건 바뀌었으니까요.
그리고 그날 밤, 얼결에 숙소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새벽 두 시에 바 투어 화산으로 일출 트랙킹을 간다는 얘기를 듣다가 얼결에 여기에도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이 선택이 얼마나 잘한 선택인지도 모르면서요. 인생이 그런 것 같습니다. 철저하게 생각하고 계획하려고 해도 때로는 다 소용없는 게. 삶은 예측 불가한 것 투성입니다. 흥미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