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모로코의 쿠리야(Korean) - 02. 데리자와의 첫 만남
여행객의 입장에서 라바트 투어(Rabat Tour)를 한 후, 새롭게 시작하는 월요일. 이제는 여행객에서 벗어나 진정한 KOICA 해외봉사단이 되기 위한 두 달간의 현지적응훈련이 시작되었다. 그 첫 번째는 수백 번 말해도 모자랄 만큼 중요한 현지어 학습이다.
*쌀라무알라꿈 : 모로코에서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하는 인사말이다. 대답은 ‘와 알리 쿰 쌀람
모로코에는 이슬람 문화와 유럽문화, 프랑스 식민지였던 역사의 영향으로 다양한 언어가 공존한다. 먼저 이슬람 문화의 영향으로 클래식 아랍어를 사용하며, 프랑스의 식민지시절 상용되어 현재까지 이어져온 불어도 사용한다. 이 둘은 대표적인 모로코의 공용어이며, 대도시 및 공문서에서 사용된다.
하지만 클래식 아랍어와 불어는 학교에서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어 학교를 다니지 못한 시골 아주머니들이나 시골 지역의 아이들, 사막지역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아랍어에서 변형된 모로코식 아랍어 ‘데리자(Derija)’를 사용한다.
데리자(Derija)는 구전으로 전해지는 모로코 언어이므로 문자가 없고, 소리 나는 대로 아랍어나 불어를 사용하여 쓰는 것이 전부이다. 때문에 모로코 사람들은 학교에서 아랍어와 불어를 배우지만 일상대화에서는 데리자(Derija)를 사용하고, 글을 쓸 때만 클래식 아랍어나 불어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영어도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영어는 대학교 이상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배우고 사용하고 있어, 모로코의 지식인층을 나타내는 부산물일 뿐 많이 사용되고 있지는 않다.
이처럼 다양한 언어가 공존하는 모로코에서는 3개 국어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조그마한 초등학생들도 클래식 아랍어와 불어, 데리자(Derija)를 기본으로 하며, 고등학생들은 선택과목으로 스페인어와 영어를 배워 4개 국어까지 한다. 언어의 자극이 많고, 아랍어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 발음 덕분에 모로코는 언어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는 언어의 천국이며, 다국어를 구사하는 인재들의 천국이다.
공용어의 특성상 모로코의 수도에서나 공공기관에서는 불어와 아랍어를 쓰지만 거의 모로코 전 지역에서는 모로코식 아랍어인 데리자(Derija)를 쓴다. 물론 KOICA 국내훈련 때 나는 열심히 불어를 배웠었다. 하지만 내가 2년간 봉사활동을 하게 될 티플렛(Tiflet)은 수도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때문에 난 다시 처음부터 모로코 식 아랍어 데리자(Derija)를 배워야 했다.
정말 ‘맙소사!’였다. 처음에는 불어를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지 못하고 모로코식 아랍어를 배우게 된 것이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이내 현지어를 배우게 되면 시골지역에서 모로코 사람들과 좀 더 가깝게 지낼 수 있고, 그들의 생활에 더 깊숙이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아 오히려 행운이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실제로도 물건을 깎거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할 때 불어보다는 데리자(Derija)를 사용하면 신기해하고, 마치 친구처럼 ‘어떻게 데리자(Derija)를 할 수 있니?’라며 호기심과 함께 끝없는 호의를 마구 베풀어 주시곤 했다. 이 덕분에 얻어먹은 음식들과 깎은 물건 값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으니 데리자(Derija)의 유용성은 과히 최고라고 하겠다.
게다가 모로코를 여행하던 중 데리자(Derija)로 자연스럽게 이야기 했던 알제리 사람을 통해 모로코식 아랍어가 북아프리카 지역의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의 아랍어와 비슷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모로코식 아랍어가 북아프리카의 4개국에서도 통용된다니 그야말로 ‘1타 5피’의 유용성이 아니겠는가. 배우면 배울수록 그 유용성을 알게 되니, 두 달간의 힘든 현지어 공부임에도 힘이 불끈 불끈 솟았다.
하지만 현지어를 배우겠다는 넘치는 의욕과 달리 현실은 암담했다. 아랍어에서 파생된 데리자(Derija)의 문자는 모두 꼬불꼬불 지렁이 글씨에 한 번도 발음해 보지 않았던 소리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목청을 쥐어짜면서 발음을 해도 목구멍 깊숙이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현지인의 발음을 따라가기 만무했다.
그래도 매일 조금씩 배운 현지어 학습시간은 문맹이었던 나에게 글을 쓰고, 읽고, 말하게 해주었고, 어느 순간 내 입도 트이게 해주었다. 이 덕분에 2년간의 모로코 생활을 어려움 없이 할 수 있었으니 그저 ‘함두렐라’할 따름이다.
*함두렐라 : 모로코식 아랍어로 신에게 감사하다는 뜻이다.
데리자(Derija)를 배우기 위해 찾은 아랍어 학원의 첫 느낌은 또 다시 유럽에 온 듯했다. 아침 일찍 코디네이터인 브라힘의 안내로 도착한 유럽풍의 하얀색 2층으로 된 학원은 미국, 유럽 등 외국인들이 함께 있는 국제적인 공간이었다. 영어와 불어, 데리자(Dahija)가 함께 하는 공간.
이곳에 동양인은 나와 함께 데리자를 배우는 동기 4명뿐이었다. 그만큼 모로코에서는 동양인을 보기가 힘들다. 동양인을 보기 힘든 만큼 모로코 사람들도 우리를 신기하게 여기는 듯했다.
그래서 생기는 많은 편견과 오해, 잘못된 행동들은 현지어 학습을 위해 등하교 하던 우리들을 괴롭히곤 했다. 실례로 우리가 지나가면 중고등학교 남학생들이 ‘신와 신와’라고 부르며 무시하듯 키득키득 거리며 지나갔고, 심지어는 중고등학생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무시하는 듯한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이로 인해 아랍어 학원을 다니던 나와 단원들이 종종 기분이 상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울컥하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는 이 또한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며 애써 마인드 컨트롤을 할 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신와(Chinois) : 모로코 사람들이 중국인을 비하하여 부르는 말
사실 모로코에 오기 전에 한 달간 갔던 방글라데시에서는 사람들 모두 외국인들의 원조에 대해 고맙게 생각하였고, 외국인이 관광객보다는 NGO에서 일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외국인에게 매우 관대했었다. 때문에 한 달 동안 한껏 대접받고 연예인처럼 다녔었는데 이곳은 아니었다. 동양인을 비하하는 문화적 편견과 시각들, 관심을 넘어선 놀림과 무시하는 언행들은 모로코에 적응하려는 우리들을 움츠려들게 하는 모로코의 현실 중에 하나였다.
그러고 보면 과거 우리에게도 흑인을 ‘깜둥이’, 중국인을 ‘짱깨’라고 부르며 무시했던 행동들과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보고 우리가 은연중에 무시하며 깔보는 듯한 태도들이 존재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그릇된 행동들을 정 반대로 우리가 당하는 입장이 되는 곳이 바로 모로코였다.
사실 처음에는 기분이 많이 상했었다.
누군가 나를 이유 없이 무시하고 놀린다면 기분 좋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한편으론 내가 한국에서 만났던 동남아시아 사람들, 그리고 흑인들, 얼마 전 방글라데시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대했던 나의 무의식적 모습들과 그 속에 잠재된 나의 편견과 시각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로 인한 나의 그릇된 행동들을 생각해 보니 이곳의 상황이 오히려 나를 반성하는 기회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환대와 무시. 이 둘의 경험은 분명 좁은 시각과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물론 모로코에서 2년간 생활하면서 동양인을 무시하는 태도들을 겪을 때마다 난처하고 기분 상한 적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좀 더 넓은 시각으로 대처하는 나만의 방법들을 만들게 되었고, 웃으며 넘어가는 여유도 생기게 되었다.
모로코에서 동양인을 대하는 이러한 부정적인 시각은 나뿐만 아니라 모로코에 파견되는 KOICA단원들이라면 겪어야 할 실제적인 문제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대처할 만한 자신만의 방법들을 미리 생각해보고 고민해 보는 것이 좋다.
*스위야 스위야 : 모로코식 아랍어로 조금씩 조금씩 이라는 뜻
모로코에서의 현지어 학습은 매일 매일이 새로운 경험의 연속이었다. 유숙소에서 학원에 등하교 하는 일부터 꼬불꼬불하기만 했던 아랍어를 읽고 쓰고 말하기 까지. 매일 아침 8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현지어인 데리자(Derija)수업은 두 달간 계속되었다.
이렇게 반복되는 일상에 힘이 들고, 등하교 길에 속상한 일도 종종 겪었지만, 유럽풍의 멋진 학원에서 정다운 선생님들을 만나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은 언제나 설레고 즐거운 경험임엔 틀림없었다.
분명 하루하루는 힘들었지만 하루하루가 모인 두 달간의 현지어 수업이 내가 펼칠 2년간의 모로코 생활을 원활하게 해주는 튼튼한 밑거름이 되었으니 말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듯이 ‘스위야 스위야’ 데리자를 배우면서 꼬불꼬불 현지어를 익혀나가는 시간들이 힘들었지만 즐거움이 더 컸던 소중한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