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부 모로코의 쿠리야(Korean) - 05. 나는야 민간 외교관!
모로코 생활 2주째 브티하(Btiha) 아주머니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던 중의 일이다. 홈스테이 생활은 주중인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데리자(Derija)학원을 다니고, 5시에 학원을 마치고 나면 홈스테이 집에서 저녁을 먹고, 씻고 학원 숙제를 하다가 잠이 드는 단조로우면서도 바쁜 생활의 연속이었다.
어찌 보면 매우 단순한 일상이지만 타국에서의 생활은 거리를 걷는 것부터 학원에서 데리자(Derija)를 배우는 것까지 한국에서보다 몇 배로 피곤함을 느끼게 했다. 이 때문에 저녁 7시쯤이 되면 녹초가 돼 나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보통 7시에 잠이 들면 다음날 새벽 4시, 5시에 모스크의 ‘알라~’라는 소리에 잠을 깨곤 했다. 하지만 피곤함에 또다시 잠이 들었고 학원에 가기 위해 7시쯤 일어나 홈스테이 가족들과 서둘러 아침식사를 하는 것이 반복되는 홈스테이의 일상이었다. 이렇게 단조롭고 바쁜 생활도 어느덧 일주일이 지나갔고, 처음 맞이하는 여유로운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스바헤 히르(Sbah-xir) : 데리자 아침인사 - 좋은 아침이라는 뜻
일요일은 학원에 가지 않아도 되므로 오랜만에 여유로운 아침을 만끽한 채 나는 더욱더 이불 속을 파고들며 늦잠을 자고 있었다. 이날도 어김없이 ‘알라~’라는 모스크 소리에 새벽 5시에 잠이 깼다가 다시 잠들었기 때문에 나는 해가 높이 떠올라도 모른척하며 잠을 청했다. 그때 홈스테이 집 아들 알라(Ala)가 2층에서 늦잠 자고 있는 나를 불렀다.
‘소피아(Sofia)~ 소피아(Sofia)~'
*소피아(Sofia) : 모로코에서 현지인 친구들에게 추천받아 지은 모로코 이름.
추천받은 십여 개의 이름 중 이지선에 ‘S’가 들어가 비슷한 느낌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
집안이 떠나가라 부르는 알라(Ala)의 소리에 잠이 깨어 시계를 보니 8시 30분이었다. 보통 때보다 한 시간 정도 늦게 일어난 셈이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1층 부엌으로 갔을 때는 브티하(Btiha) 아주머니가 빵을 굽고, 아떼이(모로코 전통차)를 다 준비해 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늘 깔끔한 모습으로 아침을 맞이하다가 처음으로 자다 일어난 부스스한 모습으로 등장한 내 모습에 아주머니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어쨌거나 오늘은 늦잠을 잘 수 있는 즐거운 일요일이 아니었던가. 아주머니 역시 레스토랑 출근할 때와는 다른 편한 잠옷 차림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편안한 모습에 좀 더 친밀감을 느끼며 오랜만의 여유로움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보통 때는 아주머니가 차려주신 빵과 아떼이를 마시고 서둘러 학원에 갔지만 이날은 브티하(Btiha) 아주머니와 TV가 있는 작은 살롱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했다. 아주머니와 나는 늘 간단한 영어로 서로의 생활, 굳이 말하자면 내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나는 시간이 나는 대로 바쁜 아주머니 옆에서 학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내가 배운 데리자(Derija) 발음이 맞는지, 모로코 사람들의 문화나 생활모습은 어떤지, 내가 어디에서 어떤 모로코 사람을 만났는지에 대해 조잘조잘 이야기 하곤 했다.
그러면 브티하(Btiha) 아주머니는 나의 서툰 데리자(Derija) 발음에 박장대소를 하거나, 때로는 진지하게 자신의 사업에 대한 걱정거리를 이야기하곤 했었다. 늘 스치는 시간의 짧은 대화뿐이었지만 이날 아침에는 여유로움이 있었고, 서로 알아간 지 일주일이 지난 터라 더욱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늘 카리스마 넘치며 레스토랑의 종업원들을 지휘하던 브티하(Btiha)아주머니는 이날 나의 이런저런 고민들을 들으며 힘내라고 토닥여주면서, 매주 일요일 아프신 친정어머니의 집에 가며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된다는 이야기, 남편과 딸이 외국에 있어서 만나지 못해서 외롭고 힘들다는 이야기 등을 내게 털어놓았다. 나또한 가족과 떨어져 2년간 타국에서 살아야하는 어려움과 그리움을 이야기하며 아주머니와 나는 서로를 이해하고 진심으로 위로해 주고 있었다. 이렇게 브티하(Btiha)아주머니와 내가 짧은 영어와 데리자(Derija)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내 머리를 ‘쿵’ 치는 이야기를 들었다.
“너는 이전에 있던 한국아이와 다른 것 같아.
그녀는 항상 방에 있거나, 아침을 먹을 때만 잠시 나왔었어.
너처럼 이야기를 많이 하지도 않고 말이야.
그래서 난 보통 한국 사람들이 그러는 줄 알았거든?
한국 사람들이 원래 그러니? 아님 너만 그런 거니? ”
“쿵!!!”
브티하(Btiha) 아주머니의 이 말은 머리에 번개를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게 만들었다. 물론 아주머니에게 “제 성격이 원래 사람들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느끼는 것을 좋아해요. 그리고 예전에 홈스테이를 하던 그녀는 부끄러움이 많아 처음 만난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을 어려워했던 것 같아요.”라고 대답하긴 했지만, 난 이 대화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브티하(Btiha) 아주머니는 나를 통해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내가 무심결에 하는 말과 행동, 심지어 옷차림과 머리모양까지도 고스란히 한국의 대표이미지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동양인이 적은, 더군다나 한국인은 극소수인 모로코에서는 한국을 알고, 느낄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나와 같은 KOICA 봉사단원이나 모로코에서 일하는 한국인이 전부라는 것을 새삼 느끼는 아침이었다.
외국에 오면 애국자가 된다고들 한다. 애국자가 된다는 것은 한국을 대표하는 자신의 몸가짐과 태도에 대한 책임감 또한 커지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길 위의 우연한 만남과 모로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모로코를 바라보듯 이들도 나를 통해 한국을 바라보고 있으니 말이다.
이날 브티하(Btiha) 아주머니와의 대화를 통해 한국 민간외교관이라는 책임감에 어깨가 살짝 무거워졌지만, 반복되는 생활에 따른 나태함을 바로잡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렇게 눈부신 햇살이 비치는 살롱에서 부스스한 모습으로 모로코 전통 빵과 아떼이를 마시던 나는 지나온 나의 모로코 생활을 뒤돌아보면서, 앞으로 한국 민간외교관으로서 부끄럽지 않는 생활을 하리라 다시 한 번 각오를 새롭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