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모로코의 우스떼다(Teacher) - 03. 내가 가진 모든 것
문화라는 것이 삶에 미치는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특히 이슬람은 생활 속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이다. 이슬람 종교가 지배하는 모로코의 문화에서 대다수의 아이들은 자유가 없다. 그저 코란을 읽기 위한 글공부를 하는 것이 이슬람 아이들의 의무이자 교육일 뿐이다. 그래서 아이들이 ‘노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며, 유치원 일정도 글공부 위주로 운영되고 있었다.
특히 티플렛(Tiflet)의 작은 시골마을은 더욱 보수적이어서 학부모들의 주된 관심사도 아이들의 글공부뿐이며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가 가장 큰 요구였다. 게다가 이곳은 어른들이 아이들을 너무 험하게 다루고 있었다. 아이들의 인권이나 그들을 존중하는 태도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부모들은 아이가 칭얼대면 뺨을 때리고, 잘못을 하면 머리와 몸을 가리지 않고 마구 때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현재의 우리나라에서는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우리나라도 분명 ‘아동의 권리’, ‘어린이날’과 같은 오랜 시간에 걸친 인식개선으로 아이들의 권리를 존중하게 되었을 것이다. 현재는 존중이 지나쳐 과잉보호로까지 이어져 새로운 문제를 가져오는 아이러니함도 있지만 말이다.
처음 기관에 갔을 때, 현지인 유치원 선생님은 아이들이 고사리 손으로 빼곡히 적은 공책들과 웅변을 하듯 큰소리로 “와헤다, 쥬지, 틀레타(모로코 식 아랍어로 숫자 1,2,3)”를 외치는 모습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나를 의식하며 선생님의 지휘 하에 목청이 터져라 소리치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교실을 얼른 빠져나왔던 것도 씁쓸한 기억의 한 조각으로 남아 있다.
그렇게 기관에서 현지인 교사의 글자 수업을 보고 난 후, 나는 혼란에 빠졌다. 이곳에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이 나라 문화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인지, 클라이언트의 욕구가 가장 중요한데 이들의 욕구가 글공부에만 치중되어 있다면 난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그리고 아이들에게 하루 종일 글공부만 시키는 것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등등 수많은 고민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때가 처음 티플렛(Tiflet)에 도착한 6월이었고 학기가 끝나가던 즈음이었다. 그리고 7월과 8월은 이슬람 라마단이 포함된 방학기간이라 본의 아니게 임지에 간 후 바로 2달간의 공백 기간이 생기게 되었다. 이렇게 2달 동안 시민의 집의 환경과 현지인 교사들, 학부모들을 생각하며 앞으로의 나의 역할에 대한 깊은 고민이 꼬리를 물었다.
환경이 어떻든 나는 이슬람 문화 속의 이 보수적인 시골마을에서 2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렇다면 이슬람이라는 문화 속 작은 시골마을의 보수적인 학부모들과 교사들 사이에서 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이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끊임없이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내가 이곳에 온 이유와 목적을 찾으려 애를 썼다. 또한 그들의 욕구를 파악하고, 그들이 원하는 교육과 환경을 제공해 주고 싶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는데 안간힘을 쏟았다.
너무 글자교육에만 치우쳐져 있는 그들의 교육방식과 아이들의 몸에 맞지 않는 성인용 책상과 의자들을 보면서 한국의 유치원환경처럼 아이용 책걸상과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는 교구들로 환경구성을 해주고 싶기도 했다. 그러면 잠시지만 한 시간 만이라도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원하는 교구를 선택하고 이야기하며, 자유놀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보았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환경구성을 하려면 많은 교구와 학습 자료들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곳에는 그 흔한 색종이조차 없었다. 색연필과 색상지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이곳에 있는 2년간은 매번 KOICA에 용품을 신청해 수업을 진행해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떠난 2년 후에는 과연 이 과정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일회성 프로그램은 단기간에 그치고 그 효과와 혜택을 받는 아이들도 적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어떡하지?’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때 어느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장면이 있었다. KOICA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이 나에게 던졌던 질문. “그곳에 가면 환경이 열악해서 아무것도 없을 텐데, 어떻게 교육을 하실 건가요?” 그때 난 당당히 이렇게 대답했었다. “그곳에는 인공적인 교구와 자료가 없을지는 몰라도 풍부한 자연환경이 있습니다. 저는 그 자연환경을 이용해서 모래놀이도 하고, 나뭇잎과 꽃들을 이용해 아이들에게 자연친화적인 교육을 할 것입니다.”라고 말이다. 그때의 대답이 어쩌면 지금 나의 고민에 답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그들의 언어를 사용해서 그들의 문화 정체성을 심어주고, 자연 속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생태교육프로그램이 이곳에 적절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제대로 된 연간 프로그램, 월간 프로그램, 일일 프로그램도 없는 모로코에서 선진국에서의 물품 지원이 아닌 그들이 가진 자연과 문화,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교육프로그램도 개발해 보고 싶어졌다. 내가 얼마큼 할 수 있을지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모로코 문화와 환경에 적절한 연간프로그램이 완성된다면, 작은 마을 티플렛(Tiflet)을 넘어 모로코 전 지역의 아이들이 같은 교육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면 선진국에서의 물품지원과 자원봉사자 없이도 현지교사가 가르칠 수 있는 모로코식 유아교육이 탄생될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해보았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을 현지어인 ‘데리자’ 혹은 ‘불어’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간단한 의사소통을 넘어서 그들과 토의를 해야 하고 때로는 그들을 설득도 시켜야했다. 넘어야 할 고비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었다. 그뿐이랴 관련 자료를 찾고 프린트 할 환경도 없었다. 이제부터 하나씩 환경을 만들고, 공부를 하고, 현지인들과 부딪쳐 의논해 가면서 이 머나먼 여정을 시작해야했다.
그 여정 속에서 힘에 겨워 포기하고 싶을지도 모르고, 더 나은 방안을 찾아 목표를 수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엇이 되었든 이곳 모로코의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교육프로그램을 반드시 만들고 싶을 뿐이었다. 작은 가슴 속에 꿈의 씨앗을 심고, 그 씨앗이 꽃피울 모로코 아이들의 꿈을 위해서.
이렇게 나는 작고 솜털 같은 순수한 모로코 아이들과 나를 의심 반 경계심 반으로 쳐다보는 현지인 교사들을 향해, 글공부만을 원하는 학부모들을 향해, 보수적인 작은 티플렛(Tiflet) 마을을 향해, 나아가 모로코의 다른 지역의 더 많은 아이들을 향해 내가 줄 수 있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첫 발을 조금씩 내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