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모로코의 우스떼다(Teacher) - 08: 첫 학부모 총회
처음 시민의 집에 와서 기관장, 유치원 원장과 활동협의를 할 때였다. 다양한 예체능 수업을 계획하던 나를 보며, 기관장과 유치원 원장은 이슬람국가인 모로코에서는 학부모들이 보수적이라 불어와 아랍어 공부만을 원하며 예체능 활동은 시간낭비라 싫어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난 그때 그 말을 믿었었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하루 이틀 아이들과 예체능 수업을 하면서 나는 기관장과 유치원 원장의 의견이 아닌 실제 학부모들의 의견을 직접 듣고 싶어졌다. 그들이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고 싶었고, 학부모들에게 아이들의 발달단계와 예체능 교육의 필요성을 설명하면 아주 조금이지만 학부모들의 인식도 변화되지 않을까라는 기대도 해보았다.
아이들과 예체능 수업을 하던 10월의 마지막 날. 내 맘대로 학부모 총회를 계획하고, 무작정 아이들과 현지인 교사에게 공표해버렸다. 사실 마음속으로 언젠가 학부모들을 초대해서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보여주고, 아이들을 존중하고 부모가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부모교육을 해주고 싶었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는 아니었는데, 일을 저지르고 나니 당황스러운 마음도 들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학부모 총회 하루 전날에 일어났다. 동물원 프로젝트 수업을 마치며, 아이들의 완성된 첫 작품들을 학부모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난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얘들아. 너희들이 만든 동물원 너무 멋지지 않니?
우리 엄마 아빠한테 동물원 보여줄까?”
“네~!”
“그럼, 내일 지금까지 너희들이 그린 그림과 활동했던 사진들을
부모님께 보여줄 테니, 부모님을 모시고 오렴.”
그리고 그날 밤. 난 무턱대고 던진 나의 말에 책임을 지기위해 2달 동안 수업하며 찍은 수백 장의 사진들을 밤새도록 음악과 함께 엮어 30분짜리 동영상을 만들었다. 졸린 눈을 비비며 내가 왜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를 몇 번이나 후회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새벽녘이 지나고 드디어 시골마을 티플렛(Tiflet)의 첫 학부모 총회가 열렸다.
10월의 마지막 금요일에 열린 부모교육은 매시간 각 반의 학부모들에게 아이들 활동사진을 보여주며 시작되었다. 사진기가 보편화 되어 있지 않은 티플렛(Tiflet)에서 자녀들의 활동모습이 커다란 스크린에 보이자 학부모들은 무척이나 신기해하면서도 진지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활동사진만으로도 학부모들의 예체능 활동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아졌을 정도였다.
활동사진을 본 후에는 아이들과 함께 ‘동대문 놀이’도 하고, 아이들이 만든 ‘티플렛(Tiflet) 동물원’ 작품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늘 집안일만 하며 아이들과 놀아주는 시간 없이 바빴던 학부모들은 아주 오랜만에 자녀들의 손을 잡고 아이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동대문 놀이’에 참여했다. 그렇게 아이들의 활동 모습을 따뜻하게 지켜보던 히잡을 쓴 어머니들의 행복한 미소는 잔잔한 감동과 함께 오래도록 내 가슴에 남았다.
60명의 아이들과 히잡을 쓴 학부모들과의 첫 학부모 총회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불어와 데리자(모로코식 아랍어)로 더듬더듬 부모 역할의 중요성과 아이들이 세상을 배우는 거울로서 부모는 아이들의 모범이 되어 주어야한다는 ‘부모교육’을 했다는 점이다. 물론 부족한 점이 더 많았던 첫 시간이었지만 60명의 학부모들은 노력하는 내 진심을 알아주었고, 내가 전하고자 하는 뜻도 말보다 마음으로 깊이 이해해 주었다.
그래서일까. 난 첫 번째 학부모 총회의 열띤 분위기에 휩쓸려 매달 마지막 금요일 이와 같은 학부모 총회를 하겠다고 공표하고 말았다. 어쩌면 난 한국에서나 모로코에서나 스스로 일을 만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하지만 이렇게 부모들과 아이들, 현지인 교사들도 좋아하는 학부모 총회를, 학부모들의 의견을 직접 들을 수 있어 수업에 반영할 수 있는 학부모 총회를, 작지만 조금씩 부모들의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학부모 총회를 어찌 내가 피곤하다고 안할 수 있겠는가.
자.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 난 한국으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매달 마지막 금요일은 학부모 총회를 하며 조금이나마 아이들의 자유와 권리가 존중되고, 학부모들의 사랑이 올바르게 전달 될 수 있도록 작은 씨앗을 심겠다고 또 다시 다짐했다.
무턱대고 시작된 학부모 총회를 마치며 난 너무나 놀라웠었다. 유치원 원장과 기관장의 말을 통해 들었던 보수적이고 공부만을 원하는 부모들은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그저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따뜻한 마음의 부모들만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이날의 부모교육으로 많은 것이 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교육에 대해서 한번 쯤 고민해보고, 부모로서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보는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속에서 누군가는 아이를 대하는 태도에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이렇게 아주 작고 미세하지만 모로코의 작은 마을 티플렛(Tiflet)에서는 추운 겨울을 보내고 봄의 새싹들이 돋아나듯 조금씩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이들의 작은 변화는 시간이 흘러 나에게 더 없이 큰 힘이 되어 돌아오곤 했다.
가끔 아무런 보상도 없으며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하는 현지인들의 이중적인 모습에 지쳐버리곤 했던 나였지만, 시간이 지나 사진들을 보면 그래도 내가 흘러가는 강물에 작은 씨앗을 심고 있다며 힘을 낸다. 언젠가 그 씨앗이 흘러가 꼭 필요한 곳에서 멋진 ‘싹’으로 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