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부 모로코의 사하브(Friends) - 01. 내 꿈은 좋은 사람
모든 물질에는 ‘끓는 점’, ‘녹는 점’이 있듯이 사람들 사이에는 서로 통하게 되는 ‘통점’이라는 기준점이 있지 않을까? 언어, 인종, 문화를 뛰어넘는 그 기준점. 그 기준점을 넘기까지는 서로 마음의 벽이 너무 크고 두텁지만, 찰나의 순간 그 벽이 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 분명히 있다. 또한 ‘통점’은 사람과 동물사이에도 존재해 우리는 모두 친구가 될 수 있다.
2년간의 모로코 생활에서 나는 서로의 마음의 벽이 무너지는 이 찰나의 순간들을 종종 경험했다. ‘통점’을 넘어서 친구가 된 모로코 사람들. 그리고 힘든 나를 위로해주며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곤 했던 모로코의 동물 친구들.
이들을 만나고,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고민을 나누면서 나는 언어와 문화는 다르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시대를 살아가며 똑같은 걱정을 하는 우리의 친구들이라는 것을 느꼈다. 네 번째는 그들의 꿈과 삶의 모습을 통해 우리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깊은 동질감과 위로를 얻은 이야기이다.
*사하브 : 모로코식 아랍어 데리자(Derija)로 '친구들'이라는 뜻이다.
모로코에서는 유난히 비슷한 이름들이 많은데, 이슬람 역사에 나온 사람들의 이름을 대물려 쓰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인지 모로코에서 가장 흔한 남자이름은 이슬람의 창시자인 ‘모하메드’이고, 여자 이름은 모하메드의 셋째 딸인 ‘파티마’이다. 내가 아는 모하메드와 파티마도 셀 수 없을 정도이니 이슬람 국가에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모하메드와 파티마가 있는 셈이다.
‘세이드’ 역시 모로코에서 흔한 이름 중에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 뜻은 데리자(모로코식 아랍어)로 ‘행복’이다. 세이드는 86년생으로 2010년 메크네스(Meknes)에 있는 대학에서 공학을 전공한 25살의 똑똑한 청년이다. 서글서글한 얼굴에 큼직한 키와 덩치 그리고 이와 대비되는 작은 얼굴. 그리고 늘 깔끔하게 옷을 입고 짧은 스포츠머리를 왁스로 한껏 멋을 부리던 그는 특히 웃는 모습이 선한 사람이었다.
이런 세이드를 만나게 된 것은 티플렛(Tiflet)에 와 어렵게 집을 구했을 때쯤이었다. 4층으로 된 단독 건물에 1층은 가구 집, 2층은 변호사 사무실, 3층은 우리 집, 4층은 옥탑 방이 있었는데 그가 4층 옥탑 방으로 이사를 오게 된 것이다.
카사블랑카(Casablanca) 옆의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던 그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인턴으로 일하기 위해 이곳저곳 엔지니어 회사를 알아보던 중 해외계열사의 한 공장이 티플렛(Tiflet)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하였고, 다행히 2개월간 인턴으로 일하는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첫 직장을 구해야 하는 만큼 가족들까지 모두 티플렛(Tiflet)에 와서 집 청소도하고 책상과 살림살이 이것저것을 챙겨주었다. 우연히 집을 나서는 길이었는데 위층에 새로 이사 온 사람이라며, 세이드와 세이드 누나, 삼촌까지 얼떨결에 인사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세이드가 이사 온 후 며칠이 지났을까. 낯선 모로코 남자들을 경계해야 한다는 친한 아주머니들의 조언에 따라 나는 문에 몇 개씩 잠금장치를 걸고, 열쇠를 열쇠구멍에 꽂아 놓으며 지냈다. 그런데 그는 아는 사람도 없는 티플렛(Tiflet)에서 내가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먼저 예의를 갖춰 다가왔다.
그렇게 서로 윗집 아랫집 이웃사촌으로 얼굴 인사를 나누며 시간이 지났고, 어느 주말 우리는 20대가 갖는 서로의 고민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세이드는 대학에서 불어로 수업을 받았기 때문에 불어도 유창하게 잘하고, 영어에도 관심이 많아 영어도 잘하는 똘똘한 친구였다. 이런 세이드 덕분에 우리의 대화는 불어, 영어, 데리자(모로코식 아랍어)가 뒤죽박죽 섞여 있었지만 의사소통을 하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25살 세이드는 회사에서 무급으로 일하며 일을 배우는 중이었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일하는 인턴생활이 육체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힘들고 어렵다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현재 인턴을 하고 있지만 취업이 안 될지도 모른다며 걱정하는 세이드. 20대의 청년실업문제와 취업걱정은 이곳 아프리카 땅에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세이드는 아침과 저녁을 집 앞에서 파는 5DH(650원) 짜리 샌드위치로 때우며 최소한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무급으로 일하는데다가 비싼 집세에 식비까지 경제적으로 부담되었던 듯했다.
실제로도 세이드는 3남매의 막내였는데,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3남매가 시골마을에서 어렵게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세이드는 집안의 장남으로서 누나들의 결혼도 신경 써야 했고, 무엇보다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러한 책임감에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메크네스(Meknes)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고, 이제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세이드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 어깨에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는 그가 안쓰러웠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어머니와 누나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과 부담감이 얼마나 컸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긍정적인 마인드로 성실하게 웃으며 일하는 그가 정말 대단해보였다.
막막한 현실의 고민들과 가족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에 버거워하는 세이드의 가슴 속에는 과연 어떤 꿈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원래 사람들의 ‘꿈’에 관심이 많고, ‘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던 나는 그에게도 어김없이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그는 처음 받아보는 추상적인 질문에 순간 너털웃음을 지으며 당황해 하였다. 하지만 진지하게 물어보는 나의 모습과 나의 꿈 이야기를 듣던 그는 곰곰이 생각한 후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다.
“내 꿈은 좋은 사람(Good man)이 되는 거야.”
“왜?"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늘 좋은 사람이 되라고 하셨거든.
그래서 내 이름이 세이드(행복)인지도 모르겠어.”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눈가가 살짝 촉촉해진 그는 나에게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듯, 눈물을 감추며 다시 씨익하고 웃어 보였다.
“그렇구나. 좋은 사람. 멋진데?!
그런데 네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란 어떤 모습이야?
각자가 가지고 있는 좋은 사람이 다를 수 있잖아.”
“음. 나는 사람들이 지나가다가 ‘세이드 어때?’라고 물었을 때,
‘세이드는 참 좋은 사람이야.’라는 대답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리고 학교에서 팀별 과제를 할 때 양쪽으로 서로 의견이 갈라지는 경우가 있잖아.
그때 모든 조원들이 하나의 길로 갈 수 있게 양쪽의 의견을 조율하고
팀을 하나의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사람도 되고 싶어.
친구들이 어려워할 때 내일처럼 도와주고,
갈등이 있을 때 원활하게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것.
이게 내가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야.”
“우와. 정말 멋진 꿈이다. 그러고 보니 너 참 착하고 좋은 사람 같아.”
“하하. 고마워, 앞으로도 난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할 거야.
그래서 난 내 이름이 ‘세이드’인 게 좋아.
내 이름처럼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3남매 중 가장이자 경제적 책임에 하루하루가 힘겹지만 즐겁고 성실하게 살아가던 그의 꿈은 ‘좋은 사람(Good man)’이었다. 꿈 이야기를 하니 이미 인턴생활의 고단함은 다 잊은 듯이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세이드. 이렇게 그와 나눈 20대의 고민과 미래에 대한 다짐들은 그의 2개월 인턴생활이 끝나고, 그가 다시 카사블랑카 옆 작은 시골마을로 돌아가며 끝이 났다.
짧은 인연을 마치며 나는 그에게 한국에서 올 때 사온 한국 전통문양이 그려진 책갈피와 열쇠고리, 그리고 응원의 편지를 선물했다. ‘지난 2달간의 힘들었던 경험들이 앞으로 너의 꿈과 미래에 힘이 되어 주기를 바란다.’라는 짧은 응원의 메시지와 함께.
그리고 6개월 뒤 그는 인턴으로 일했던 해외계열사의 티플렛(Tiflet)공장에 정식직원이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해왔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사람들에게 행복을 나누어 주려고, 자신을 희생하며 꿈을 향해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행복 청년 세이드를 나는 가슴 깊이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