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는 아이 - 두 번째 발걸음
숫자가 겹쳐 보이는 순간,
입보다 먼저 나오는 말,
그리고 마음보다 먼저 참는 법을 배우는 아이.
다이소 앞에서 용돈 지갑을 꼭 쥔 윤현이의 하루는,
한없이 작고도 커다란 ‘성장’의 이름으로 기록됩니다.
나는 참는 아이 - 두 번째 발걸음
3월 10일, 일요일
오늘은 일요일이다.
학교 안 가서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말했다.
“심심해요. 뭐 재밌는 거 없어요?”
엄마가 말했다.
“윤현아, 오늘은 다이소 구경 갈까?”
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고 싶어요. 아이클레이 사고 싶어요.”
차를 타고 다이소에 갔다.
나는 용돈 지갑을 꼭 쥐고 들어갔다.
클레이를 찾으러 바로 갔다.
말랑말랑한 아이클레이가 반짝거렸다.
진짜 예쁘고, 사고 싶었다.
다이소는...
예쁜 게 많고, 사고 싶은 것도 많은데,
이상한 곳이기도 하다.
왜냐면...
내 돈인데도, 엄마가 사도 된다고 할 때만 살 수 있다.
내가 지갑 주인이지만, 진짜 주인은 엄마인 것 같다.
지갑은 내가 들고 있는데, 허락은 엄마가 들고 있다.
나는 내 손에 있는 용돈 지갑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용돈 지갑은, 돈이 있는 지갑이 아니라
허락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아빠가 내 옆으로 와서 말했다.
“윤현아, 가격표 읽어봐.
얼마인지 알면 아빠가 사줄게.”
나는 숫자를 봤다.
[₩4,000]
근데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졌다.
사천 원인지, 사백 원인지, 사만 원인 것 같기도 했다.
생각이 꼬이고, 숫자가 겹치고,
머리에서 웅웅 소리가 났다.
틀릴까 봐 무서웠다.
틀리면 아빠가 안 사줄까 봐,
다시 물어보기도 부끄러워서
나는 작게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아빠가 힌트를 줬다.
“천 원이 네 개 있는 숫자야.”
나는
1,000
+1,000
+1,000
+1,000
을 떠올렸다.
근데 생각할수록 더 헷갈렸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냥.. 너무 긴장돼서 숨이 찼다.
“사.. 사천 원이에요?”
나는 거의 속삭이듯 말했다.
아빠는 웃었다.
“정답~ 윤현이 대단한데?”
나는 얼떨떨했다.
조금 억지로 맞춘 것 같았고,
진짜 정답인지도 잘 모르겠다.
근데 아빠가 웃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다.
속에서는 말이 막 튀어나오려고 하고,
입에서는 진짜로 튀어나왔다.
“깨물부기.. 배고파요.. 이거 뭐예요.. 탁주쪼꼬.. 웃겨요?”
내 머리는 조용한데, 입은 조용하지 않았다.
내가 말한 줄도 몰랐는데,
엄마가 “윤현아~ 속으로 말해보자” 하고 말할 때
그제야 ‘아, 또 말했구나’ 하고 알게 됐다.
집에 와서 클레이를 뜯었다.
노란색과 분홍색을 꺼내서 작은 공룡을 만들었다.
엄마가 물었다.
“이거 뭐야? 귀엽네.”
나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웃겨요?”
엄마는 웃기다고 했다.
나는 기분이 좋아 웃었다.
다이소는 갖고 싶은 게 진짜 많은 곳이다.
오늘은 아이클레이를 샀다.
근데.. 내 지갑은 한 번도 안 열렸다.
그냥 조용히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내가 참는 날이 아니라,
내 지갑이 참는 날이다.
다이소 앞에서 윤현이가 용돈 지갑을 꼭 쥐고 있던 그 순간,
나는 아이의 손보다 마음이 더 조심스럽다는 걸 느꼈다.
숫자 앞에서 웅웅 거리는 머리,
긴장해서 웅크려지는 어깨,
그리고 정답인지 아닌지 헷갈려도 조심스레
"사천 원이에요.." 하고 말하는 윤현이의 용기.
나는 그 순간, 내 아이가 무언가를 사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고 있다는 걸 봤다.
말은 입보다 먼저 나와버리고,
마음보다 빨리 튀어나올 때도 있지만
그 모든 순간들이 윤현이의 언어이고,
삶이고, 진심이라는 걸 엄마는 점점 더 배워가고 있다.
다이소보다 훨씬 더 두근두근한 건,
너랑 함께한 오늘 하루였어.
오늘 처음 '아빠의 노트'를 써보려고 하는데, 윤현이만큼 잘할지는 모르겠다.
다이소에서 윤현이가 클레이 앞에 지갑 들고 서 있는 걸 봤는데, 마치 지갑을 여는 비밀번호가 엄마인 것 같았다. 윤현이는 자기 돈이 맞는데도 항상 엄마 눈치를 보느라 지갑을 못 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아주 쿨하게 말했다.
"윤현아, 가격표 읽으면 아빠가 바로 사줄게."
그런데 이게 뭐라고, 숫자를 보자마자 윤현이 머리가 과부하 걸린 컴퓨터처럼 삐익- 소리 내고 멈췄다.
그때 윤현이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모르겠는데요..."
사실 그 순간 내가 더 당황해서 그냥 사줄까 고민했다.
그래도 교육적인 아빠인 척하느라 힌트를 줬다.
"천 원짜리 네 장이면 얼마일까?"
윤현이가 한참 고민하다가 겨우 답을 말했다.
"사... 사천 원이에요?"
내가 바로 큰소리로 "정답~!" 외쳤지만, 사실은 맞아서 웃은 게 아니라, 윤현이가 너무 귀여워서 웃은 거였다.
집에 와서 윤현이가 클레이로 작은 공룡을 만들더니
"아무것도 아니에요"라고 했다.
그런데 아무것도 아니라기엔 너무 열심히 만들었더라.
윤현아,
오늘 네 지갑이 참았다고 했는데,
아빠 지갑은 또 열렸다.
아빠는 늘 네 편이야.
지갑은 내 거 써도 되니까, 마음껏 사고 싶은 거 사면서 천천히 커도 돼.
아빠 지갑은 언제나 너한테 참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숫자 공부 천천히 하자.
틀리면 그냥 사주면 되니까.
오늘의 결론:
윤현이 지갑은 잘 참는다.
하지만 아빠 지갑은 절대 못 참는다.
#아빠의 노트 #아빠등장 #지갑은 아빠가열게 #클레이천국다이소 #엄마에겐 비밀 #육아는 힘들어도 즐겁다 #숫자 천천히 배우자 #내 지갑은 이 미항복 #아빠는 늘니 편
ADHD는 단순히 '주의력 부족'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과잉 활동적이거나, 충동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윤현이가 느끼는 머리의 멍함은 바로 ADHD에서 나타나는 특징 중 하나일 수 있어요.
아이를 키운다는 건,
말보다 눈치를 먼저 배우는 작은 존재에게
조심스레 허락을 건네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윤현이의 지갑은 참았지만
그 속 마음은 말없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우리 어른들도,
그 조용한 마음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이소보다 더 두근거렸던 오늘,
아이의 한 걸음을 함께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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