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나는 참는 아이 - 세 번째 발걸음

나는 참는 아이, 윤현이



말이 먼저 나가고, 마음은 뒤따라왔던 날

아이의 하루는 언제나 예상 밖입니다.
웃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화내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말은 튀어나오고, 마음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죠.

오늘 윤현이는 도덕 시간에 웃었습니다.
웃으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그 웃음 뒤에 숨어 있던 마음을,
조금 늦게 따라 나온 진심을,
조심히 꺼내어 붙잡아봅니다.




[3/13] 웃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3월 13일, 수요일

오늘은 도덕 시간이었다.
근데 나는 선생님 말이 잘 안 들렸다.
아니, 들리긴 했는데 머리에 안 들어왔다.

선생님이 뭔가 얘기하고 있었고,
칠판에 글씨도 있었는데,
나는 그냥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처음엔 동그라미 하나 그렸고,
그게 괴물 얼굴 같아서 눈이랑 뿔도 그렸다.
입도 엄청 크게 그리고,
손도 발도 길쭉하게 만들었다.

요즘 나는 포켓몬스터를 자주 그린다.
그래서 피카츄도 그렸다.
진짜 피카츄는 잘 기억 안 나서,
그냥 내가 아는 대로 그렸다.

그 옆에는 파란 선을 막 그었다.
파도처럼 보여서 배도 그리고,
하트도 그리고,
그림은 멈추지 않았고
선생님 목소리는 멀리서 들렸다.
내 마음이 그림 안에 있어서
자꾸 그리고 싶었다.

근데 그때,
옆에 앉은 애가 갑자기 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삐죽 내밀고,
메롱~ 했다.
진짜 너무 웃겼다.
나는 그 얼굴이 자꾸 생각나서
.. 푸웁 하고 웃어버렸다.

그 순간,
선생님이 고개를 돌려 나를 봤다.
그리고 말했다.
"윤현아, 방해하지 말고 조용히 하자."

나는 딱 굳었다.
근데..
웃음이 안 멈췄다.
입은 닫았는데 배는 계속 들썩거렸다.
진짜 안 멈췄다.

선생님은 무서운 얼굴이었는데,
그 얼굴도 좀 웃겼다.
그래서 더 참기 힘들었다.

웃긴 건 걔였고,
나는 그냥 따라 웃었는데
왜 혼나는지 잘 모르겠고,
그 와중에도 계속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 말이 튀어나왔다.
"저는 안 웃었어요! 쟤가 먼저 웃었어요!"

사실 그게 아니었다.
쟤가 웃겨서, 내가 웃은 거예요.
근데 그 말이
입 밖으로는 안 나왔다.

목소리는 컸고,
선생님 눈이 조용히 무서워졌고,
애들이 나를 봤다.

선생님이 말했다.
"선생님은 네가 웃는 거 다 봤어.
거짓말하면 안 되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말이 멈췄다.

거짓말이 아니라
그냥,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던 건데.

그게 다가 아니었는데.
그게 아닌데..
그 말은 너무 늦게 떠올랐다.

그 순간,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거짓말 아니거든요!!"

정말 그랬다.
나는 거짓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다.

근데
그 말도,
또 거짓말이 돼버렸다.

내 말이 나가고 나서야
아, 그거 말고 이 말이었는데 하고
마음이 뒤늦게 손들고 나왔다.
근데 그땐 이미 늦었다.
나는 조용히 속으로 웅웅거렸다.

말은 너무 빨랐고,
마음은 너무 느렸다.

오늘은,
내가 한 말이 내 마음이 아니었던 날이었다.


엄마의 노트




아이의 말실수 뒤에 숨어 있던 마음.
그 마음이 얼마나 늦게 도착했는지, 나는 알아버렸다.

말은 빠르고 마음은 느려서
세상은 늘 말만 먼저 듣고, 마음은 오해받는다.
그런 날이 얼마나 많았을까.
내가 미처 몰랐던 날들,
윤현이가 혼자 웅웅 거리며 속으로 삭였던 순간들.

그래도 오늘, 윤현이는 그 마음을
조금은 말해줬다.
조금쯤 들켜도 괜찮다고 느낀 것 같았다.

나는 윤현이의 말보다,
그 말이 도착하기 전에
조용히 기다리고 있던 마음을 먼저 안아주고 싶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 마음을 기다릴 줄 아는 엄마이고 싶다.



아빠의 노트




일기 끝까지 읽었는데…
음, 나 언제 나와?

나 오늘 치킨도 시켜줬거든.


#아빠도등장하고 싶다
#치킨 시켰는데 일기엔 없음
#내 이름 한 번만 불러줘
#일기 끝까지 읽음 주의
#치킨으로 존재증명
#내 지갑 오늘도 안 참음
#아빠의 노트


ADHD 아이들이 자기가 생각한 대로
말을 못 하는 이유는 충동성, 주의력 부족, 집중력 어려움 때문입니다.
말을 할 때 생각을 정리하기 어려워하고, 중간에 다른 생각이 들어 대화 흐름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조금 더 시간을 주고, 천천히 말할 수 있게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빠르게 튀어나온 말보다
조용히 뒤늦게 오는 마음을 기다려주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오늘, 윤현이는 먼저 나온 말 때문에
자기 마음을 오해받았습니다.
하지만 아주 천천히,
그 마음은 결국 밖으로 나왔고
조심스럽게 닿았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아이의 말만 듣고,
그 마음은 놓쳐버리곤 합니다.

말이 전부가 아니었던 하루,
조금 늦게 도착한 진심을
오늘도 함께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참는 아이》는 현재 브런치북으로
재연재 중입니다.
1편부터 8편까지는 하루 간격으로 업데이트되며,
그 이후부터는 매주 수요일에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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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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