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아가 진짜 미안해..

나는 참는 아이 - 아홉 번째 발걸음

나는 참는 아이, 윤현이


형아가 진짜 미안해.

말로는 꺼내지 못했던 마음이

조용히 그림 속에서 피어났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은 종종 어색함을 데려오고,

사랑하는 마음은 생각보다 더 천천히 움직입니다.


입꼬리 하나 올라간 표정 뒤에

어린 형아의 복잡한 진심이 숨어 있습니다.


이번 이야기는,

그림으로 겨우 도착한 말 한마디에 관한 기록입니다.




# 9. 나는 참는 아이 – 아홉 번째 발걸음

[3/28] “형아가 진짜 미안해.”


3월 28일 목요일

오늘은 준혁이 생각이 많이 났다.

준혁이는 내 동생이고, 나보다 한 살 어리다.

엄마가 그랬다. "준혁이는 이모 아들이야."

나는 그냥 준혁이는 내 동생이고,
이모는 그냥 이모라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이모도 가족이야”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
그래서, 준혁이네 집에 가면 맨날 이모가 있었구나.

사실 준혁이는 나보다 더 착하고, 더 형아 같다.
내가 애기 때는, 말도 잘 못하고,
화나면 지금보다 더 못 참고,
갑자기 소리 지르고, 꼬집고 그랬다.

그때 아기 준혁이를 꼬집은 적이 있다. 눈 밑을..
지금도 흉터가 남아 있다.
그걸 생각하면, 가슴이 푹 찌릿하다.
내가 그랬으니까.

근데 준혁이는 지금도 나한테 “형아~” 하고 웃는다.
형아가 무서웠을 텐데도. 나 때문에 울었을 텐데도.
한 번도 나한테 화낸 적 없다.

그래서.. 나는 준혁이를 정말 많이 좋아한다.
진짜 진짜 많이.

맨날 말한다.
“준혁이랑 로블록스 하면 재밌겠다.”
“준혁이랑 놀이터 가고 싶다.”
“준혁이랑 치킨 같이 먹고 싶다.”

근데… 이상하다.
진짜 만나면, 나는 준혁이랑 놀고 싶은데
마음이 금방 다른 곳으로 튀어 버린다.

로블록스를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마인크래프트가 하고 싶고
그다음엔 또, 그림이 그리고 싶어진다.

준혁이는 어리둥절한데,
나도 그럴 때마다 진짜 미안해진다.

만나기 전엔 너무너무 좋은데,
만나면 머릿속이 웅웅 거리고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같이 놀고 싶은데,
같이 놀기 싫기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내 마음속에 걱정이 생긴다.
‘형아답게 놀아야 하는데.’
‘웃겨요? 이 말하면 안 되는데.’
‘화내면 안 되는데.’

그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웅웅 떠다닌다.

근데.. 하고 싶은 말은 안 나오고,
안 해도 되는 말만 계속 나온다.
말은 많아지는데,
내 진짜 마음은 하나도 못 나간다.

같이 놀고 싶은데,
내 마음은 자꾸 반대로 가버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그림을 그렸다.
준혁이랑 같이 포켓몬 리그에서 우승하는 그림.
그리고 입을 조금 올렸다. 웃는 얼굴로.

그걸 보고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나는 준혁이를, 진짜.. 진짜 좋아한다.

다음에 만나면, 용기 내서 말해보고 싶다.
“형아가 준혁이 진짜 좋아해.”
“형아가.. 진짜 미안해.”


준혁이의 노트


형아, 왜 그래?
형아 왜 자꾸 혼자 말을 해?
뭐라고? 하고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형아, 그게 무슨 말인데?

형아, 왜 그래?
혼자 왜 자꾸 웃는 건데?
왜 웃어? 하고 물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형아, 왜 웃은 건데?

형아 왜 그래?
나랑 놀고 싶다고 놀러 오라고 해놓고,
혼자 그림 그리고 있는 건데?

형아, 왜 그래 진짜?
같이 마인크래프트 하자고
형아가 말했으면서
나는 땅만 파고, 형아는 날아만 다니는데?

형아 또 왜 그래?
왜 웃는 거야? 혼자 웃지 말고!
말 좀 해주라고 형아~~


엄마의 노트


오늘 윤현이 일기를 읽고, 마음이 찌르르 아팠다.

어릴 적, 준혁이 얼굴에 남긴 상처를
이 아이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무서웠다.
왜 그랬을까, 앞으로도 이럴까
속상함과 두려움이 뒤섞였던 날이었다.

그런데 오늘,
“형아가 진짜 미안해.”
그 말이 그림 속에서 나왔다.

이 아이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조용히 마음을 꺼내고 있었다.

나는 그걸
조금 더 믿어줘야 한다.


아빠의 노트


윤현아.
아빠 두 편이나 못 나왔다.
너도 눈치 못 챘지?

아빠, 진짜 삐질 뻔했어.
근데 오늘 네 그림 보면서
그냥.. 마음이 말랑해졌어.

“형아가 진짜 미안해.”
야, 그 말..
진짜 어른도 하기 힘든 말이야.

그림으로라도 그 말을 꺼낸 거,
아빠는 멋지다고 생각했어.

뭐, 남자애들끼리
좀 티격태격도 하고,
다 그러는 거지.
근데 그 마음을 오래 기억하고,
그림으로 꺼내는 건,
그거 아무나 못 하는 거야.

윤현아.
넌 진심을 품고 있는 아이야.
말은 좀 돌아서 나갈 때도 있지만,
마음은 늘 네가 먼저 꺼내더라.

그림 속 너처럼,
입꼬리 살짝 올라간 얼굴로
아빠도 지금 너 보고 있어.

그러니까 다음 편엔 아빠도 같이 그려줘.
어디 구석에 조그맣게 말고,
윤현이 옆에서 웃고 있는 사람으로.
보면 딱 “아, 저건 아빠구나” 싶은 걸로. 알겠지?


#두 편 연속 출연 실패
#이건 뭐 하차 수준
#섭섭은 섭섭한 거다
#아무도 안 물어봤다 진짜로
#그림에 없어도 마음은 옆에 있었음
#입꼬리 살짝 올린 그 사람 접니다
#출연료는 없지만 존재감은 있음
#윤현이 옆에 있고 싶은 아빠
#다음 편에도 불러줘 진심이야




ADHD 아동이 오래 놀지 못하는 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뇌의 피로와 주의 시스템의 한계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에게 맞는 놀이 환경, 속도,
간헐적 휴식, 그리고 공감하는 친구나
어른의 중재가 필요합니다.


좋아하는 마음이 항상 다정하게 표현되는 건 아니니까요.

사랑해서 더 조심스럽고,
미안해서 더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 대신 그림을 꺼냈고,
그림 속에서야 겨우 입꼬리를 올려봅니다.

"형아가 진짜 미안해."

그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아이 마음 안에서는 얼마나 많은 문장이

엉켜 있었을까요.


오늘 나는,

말보다 느리게 도착한 아이의 진심 앞에

마음으로 대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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