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조사원 P가 발행한 16개의 기묘한 에피소드
에피소드 7
“아직이야?”
“응, 좀 늦나 보네.”
“이상하네. 어쨌든 잘해봐.”
“알았어. 먼저 보면 알지?”
K는 대답 대신 나의 엉덩이를 툭 치고 지나갔다. K의 뒷모습에서 마치 자기 일인 양 기뻐해 주던 그의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곳에 오래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금요일 오후이기 때문이다.
사람 개미. 그렇다. 그것은 차라리 개미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무빙워크와 출입구를 통해서 줄줄이 매장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지금 내가 서 있는 주위에서 잠시 혼란을 겪지만 이내 자신이 정해 놓은 동선을 따라 움직인다. 부딪히기도 하고 곡예하듯 피해 가기도 하는 그 모습은 우연히 땅에 떨어진 제법 큰 과자 조각이나 사탕, 그 주위를 휩쓸고 있는 개미들과 꼭 닮아 있다. 하지만 저들 중 누구도 자신을 개미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시겠지만 나는 유명 대형 할인매장에서 일하는 직원이다. 보안 및 고객 안내가 내 임무이다. 원래는 사람들 많은 곳을 싫어했지만 어쩌겠는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어서 급한 대로 구한 일자리가 바로 이 곳이다. 그러다 보니 일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늘 비슷한 모습으로 뻔히 보이는 상품 찾으러 불려 가고, 잔뜩 뿔난 개미들에게 치이고, 윗사람 눈치 보고. 정말 피곤하고 골치 아픈 일자리가 아닌가 말이다. 오늘 오후에도 매장 안에서 큰 소리를 내며 싸우는 두 아주머니 개미들을 뜯어말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나마 스트레스에 둔감한 편이라 6년이나 버텼지 다른 사람들 같으면 몇 번이나 그만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의 일상에 큰 변화가 생겼다.
“저기요. 와인 코너가 어디죠?”
하얀 원피스! 약 두 달 전, 오늘처럼 정신없는 금요일 저녁, 그녀는 교대를 위해 3층으로 가고 있던 나를 불러 세웠다. 그녀의 크고 맑은 눈망울을 내려다보는 순간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았다. 그 많던 개미들도, 그 시끄럽던 소리도 영화 속의 장면처럼 사라져 버렸다. 1초, 2초, 3초 그녀의 눈 속에 빠져있는 그 짧은 시간은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얄밉게도 그런 나에게 싱긋이 웃어 보였다. 치명적인 매력이란 게 이런 것일까?
“왜 그렇게 봐요?”
‘당신의 눈은 계속 들여다보게 되는군요.’ 하마터면 그렇게 말할 뻔했다. 그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계속 그렇게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고 있었을 것이다. 감히 말하건대 나는 그 순간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아, 죄송합니다. 고객님! 저를 따라오세요.”
허둥지둥 그녀를 와인 코너로 안내했다. 그리고는 3층으로 가야 된다는 사실도 잊은 채 와인 코너 가까운 곳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서서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우아한 걸음걸이, 와인을 살피는 눈, 머리를 쓸어 올리는 하얀 손, 그녀의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그녀가 와인 코너를 빠져나갈 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 있었다.
“저 아가씨 정말 매력적이죠?”
와인 코너 여직원이 그런 내 모습을 보고는 놀리듯 말했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어머! 홍당무가 됐네!”
나는 그곳을 벗어나 정신없이 3층으로 향했다. 그런데 3층으로 올라가는 무빙워크에서 나는 또다시 숨이 멎을 뻔했다. 내 눈 앞에 나타난 그녀의 뒷모습! 그녀는 쇼핑카트에 손을 올리고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무빙워크가 영원히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는 그런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그 후, 나는 오늘처럼 금요일 저녁만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녀도 그런 나의 그 마음을 조금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그녀는 그 정신없는 금요일 저녁, 늘 같은 시간에 내 앞을 예의 그 황홀한 눈빛과 치명적인 미소로 인사하고는 지나갔던 것이다. 한 주, 두 주, 그리고 어느새 한 달, 두 달, 그렇게 그녀는 나의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었다. 심지어 나는 시름시름 아파가기 시작했다. 더구나 이미 온 매장 안에 나의 사랑이 알려졌다. 나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고백. 그것만이 나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왜 이렇게 늦지? 혹시 오지 않는 건 아닐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그럴지도 몰라. 기다림은 끊임없이 나오는 거미줄처럼 질문과 대답으로 엮어지고 있었다. 그래 봤자 10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때였다.
“저기요. 와인 코너가 어디죠?”
나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그때처럼 뒤통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였다. 정신없이 뒤돌아섰다. 그런데, 이럴 수가! 그녀가 아니었다. 그냥 다른 여자 개미였다. 안 돼! 지금 자리를 비우면 ……. 급하게 무전을 날렸다. 하지만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되지? 여자 개미는 계속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네, 고객님! 저를 따라오세요.”
한숨이 새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그 여자 개미의 앞에 섰다. 그리고 여자 개미의 발걸음은 생각하지도 않고 거의 뛰다시피 와인 코너까지 왔다. 그런데, 그녀였다. 그녀는 바로 그 와인 코너에 있었다. 나는 순간 따라오는 여자 개미에게 미안해졌다. 뒤돌아보니 여자 개미는 쇼핑카트를 끌고 조금 뒤처져 있었다.
“고객님! 여기가 와인 코너입니다.”
나는 짐짓 밝고 큰 목소리로 여자 개미를 불렀다. 아마 그녀도 들었으리라. 나는 다시 그녀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녀는 예의 그 아름다운 모습으로 프랑스 와인들을 한 병씩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지금이다. 여기 와인 코너면 고백의 장소로도 훌륭하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런데 하필 그때 울려오는 무전기.
“지금 어디야?”
K였다. 이런 젠장. 나는 얼른 돌아서며 와인 코너 입구로 나섰다. 그리고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었다.
“와인 코너야. 왜?”
“여기야, 여기. 3층 속옷 매장.”
K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거기가 왜?”
“여기 있다니까. 너의 그녀!”
“무슨 말이야? 잘못 본 거 아냐? 지금 여기 와인 코너에 있는데.”
“너야말로 잘못 본 거 아냐? 여기 있다니까?”
이게 무슨 말인가?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여전히 와인을 한 병씩 들어서 보고 있었다.
“야, 말이 되는 소릴 해. 여기 있다니까?”
“정신 나간 거 아냐? 내 눈 앞에 있단 말이야. 빨리 올라 와.”
나도 그렇지만 K가 잘못 볼 리는 없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혹시 쌍둥이? 나는 어쩔 수 없이 3층으로 향했다. 고백은 잠시 미루어야겠다. 물론 와인 코너 여직원에게 그녀의 동선을 봐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의 빛의 속도로 3층으로 올라왔다. 그리고 숙녀복 코너를 돌아 서자 나는 그만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녀! 그녀였다. 놀랍게도 속옷 코너에 K의 말대로 그녀가 있었다.
“봐! 맞잖아.”
나를 발견한 K가 다가와서 나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정말 쌍둥이란 말인가?
“뭐해? 빨리 가서 말해.”
K가 내 등을 두드렸다.
“잠깐만, 어디로 가는지 좀 봐줘.”
나는 어리둥절해하는 K를 뒤로 하고 다시 빛의 속도로 2층으로 내려왔다. 와인 코너 직원이 가리킨 곳은 화장품 코너였다. 역시 그녀였다. 화장품 코너에서 견본용 립스틱을 만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그녀였다. K에게 무전을 쳤다.
“아직 거기 있어?”
“응. 여기 있어.”
“알았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고백이 아니라 확인이다. 그녀가 정말로 쌍둥이라면 어쩔 것인가 말이다. 내 사랑을 고백할 대상이 맞는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용기를 내서 여전히 립스틱을 살피고 있는 그녀 앞에 섰다. 화장품 매장 직원도 눈치를 챘는지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다.
“저, 고객님.”
나는 그렇게 그녀를 부르면서 곧바로 나의 어휘력을 저주했다. 나의 그녀를 부를 말이 그것밖에 없다니. 어쨌든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그리고 나를 알아봤는지 예의 그 큰 눈망울에 어린 미소로 화답했다.
“왜 그러시죠?”
“고객님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혹시, 쌍둥이세요?”
내친걸음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그것은 ‘역시나’ 하는 느낌과 약간의 비웃음기가 섞인 미소였다.
“그게 왜 궁금해요?”
그녀는 대답 대신 나를 놀리듯 되물었다.
“사실은…….”
‘저와 만나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했어야 하지만 나의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나가고 말았다.
“방금 3층에서 뵌 것 같아서요.”
“그래서요?”
‘그래서요’라니? 그녀는 자기를 흠모하는 남자의 곤경을 즐기는 못된 버릇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저렇게 맑고 투명한 눈망울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웃음기 띤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짧은 순간 수많은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나에게 말했다.
“혹시 저 좋아하세요?”
순간 나는 내 몸이 그대로 물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 마치 짝사랑하는 사람을 처음 만난 영화 <아멜리에>의 주인공 아멜리에처럼 말이다. 그녀는 정말 아무 부끄러움도 없이 그런 말을 쉽게 나한테 하고 있었다.
“네? 네…….”
얼떨결에 나는 그만 내 마음을 그렇게 고백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싱긋이 미소를 지으며 나의 손목을 잡더니 자기의 쇼핑 카트 손잡이를 잡게 했다.
“따라오세요.”
나는 무슨 귀신에라도 홀린 듯 그녀의 옆에서 그녀의 쇼핑카트를 밀기 시작했다. 주변의 다른 개미들이 이상한 듯이 쳐다보았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치 연인처럼, 부부처럼, 그녀의 곁에서 쇼핑카트를 밀고 있는데 더 무엇이 필요할까?
그녀는 3층으로 향했다. 무빙워크 끝에 K가 있었다. K는 그런 나를 보고 놀란 표정으로 윙크를 날려 주었다. 나는 그녀 몰래 K에게 손을 한 번 들어주었다. 주위의 다른 직원들도 나를 보며 때론 놀란 표정을, 때론 격려를 보내 주었다. 그녀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를 전자제품 매장으로 데리고 갔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서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였다. 분명히 또 다른 그녀였다. 그 그녀는 전자매장 안의 소파에 앉아 태연히 TV를 보고 있었다. 옷차림마저 내 옆의 그녀와 같았다. 정말 그녀는 쌍둥이였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또 다른 그녀는 너무도 태연하게 나에게 인사했다. 나는 그녀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얼떨떨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쩐 일인지 우리의 주위를 지나가는 수많은 개미들이, 아니 사람들이 우리를 어느 순간부터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의 수줍은 외사랑을 알고 은근히 응원해주던 직원들도 나와 그녀들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왜? 이상해요?”
“그렇잖아요? 당신도, 또 당신도.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
“그렇게 놀랄 건 없어요.”
“왜요?”
“우리가, 아니 내가 누구처럼 보이나요?”
“그야, 고객님…….”
아! 이 순간에도 내가 그녀를 부를 수 있는 말은 고객님 뿐이었다.
“그렇죠. 고객님. 당신에게도 나는 그저 고객일 뿐이죠. 내가 정말 누구이든 상관없죠.”
“무슨 말씀이신지?”
“당신의 마음은 잘 알아요. 하지만 이래도 당신의 마음이 변하지 않을까요?”
앉아있던 그녀가 자리에 일어섰다. 그러더니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진열된 TV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곤 화면 속에서 나에게 예의 그 미소를 보냈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내 옆의 그녀가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뒤를 돌아봐요? 저들이 모두 사람일까요?”
나는 정말로 귀신에 홀려 그녀의 말대로 매장 안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는 개미들을 보았다. 그 수많은 개미들 중에서 그런 나를 알아보고 야릇한 미소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눈을 감았다. 그러자 내 귓가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겠어요? 여긴 고객들뿐이에요. 살아있든 아니든. 이제 눈을 떠도 돼요.”
“여기서 뭐해요?”
누군가 나를 흔들었다. 낯익은 전자매장 직원이었다. 빈 쇼핑카트의 손잡이를 잡은 나는 TV 앞에 넋이 나간 채 혼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