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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일립 Jul 18. 2022

헤어질 결심 : 끝내는 순간 영원해지는 사랑의 이름

헤어질 결심

: 끝내는 순간 영원해지는 사랑의 이름으로

저번 주 금요일 퇴근 후 <헤어질 결심>을 보고 왔다. 전날 밤 나는 세 시간을 자고 어거지로 출근했으며 그날 저녁은 (돈이 없어서) 안 먹었다. 게다가 나는 영상에, 특히 헤테로-로맨스 도식을 따르는 영상에 잘 집중하지 못한다. 아무리 박찬욱이어도 재미 못 느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상영관에 들어갔다.


2시간 반이 흐른 다음 나는 영화는 역시 멜로고 박찬욱은 멜로의 신이다라는 말과 함께 돌아왔다.


주말부부 경찰인 해준(박해일)은 기도수라는 남자가 산에서 죽은 사건을 수사하다가 그의 젊은(어린) 중국인 아내 서래(탕웨이)를 만나고, 수사를 진행하나 사랑에 빠진다. 이 과정은 억지스럽거나 격정적이지 않고, 초조하고 조용하고 사랑스럽다. 서래가 용의자 신분에서 벗어나고 수사가 종결된 후에는 사랑이 무르익는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서가 된 휴대전화를 발견한 해준은 서래가 진범이었음을 알아내고 갈등하나, 결국 자신의 내면이 붕괴되었다고 말하며 서래를 떠난다. 유일하고 결정적인 단서인 휴대전화를 바다에 던지라는 말을 남긴 채.


이후 아내가 사는 곳으로 근무지를 옮긴 해준이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면증에 시달리는 장면과 서래가 다른 남자에게 맞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서래의 두 번째 남편 임호신도 살해된다. 해준은 또 남편이 사망했다는 말에 서래에게 "내가 그렇게 만만합니까?"라고 물으며 철저히 수사한다. 그러나 해준의 생각과 달리 진범은 서래의 남편에게 돈을 뜯긴 사철성(서래를 때리고 있던 남자)이었고 수사는 종결된다.


그러나 해준은 서래가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사철성을 교묘히 이용해 임호신을 처리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래는 그와의 통화에서 “당신이 사랑을 말한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난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죠”라고 중국어로 말한 뒤 차를 몰아 바다로 향한다. 서래는 해준의 영원한 미결 사건이 되는 동시에, 해준이 자신을 만나고 붕괴되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해변에 구덩이를 파고 천천히 차오르는 밀물과 함께 사라진다. 뒤늦게 그곳에 도착한 해준은 서래를 찾지만 서래가 묻힌 곳 바로 옆에서 그녀를 찾아 헤매고, 그런 그를 파도가 덮치며 영화는 끝난다.


<헤어질 결심>은 모든 면에서 흠잡을 데 없는 한 편이었으며 최대한의 친절함과 곳곳에 별사탕처럼 뿌려 둔 유머로 무장했고, 나는 다리 한 번 안 떨고 온전한 집중력으로 영화에 빠져들었다.


좋은 장면이 너무 많았다. 이쪽에 넣어 둔 아주 작은 디테일이 저쪽에서 변주되어 튀어나오는 식의 연출이 계속되어 좋았고, 배우들의 연기는 탁월했으며 조연들까지 제 자리에 꼭 맞아들어갔다.


그 중에서도 내가 최고로 꼽고 싶은 장면은 서래가 해준을 재우는 장면이었다. 해준은 서래의 목소리와 숨소리를 들으며 잠들고 두 사람의 호흡이 겹쳐진다. 사실 사랑으로 불면증이 가라앉는 연출은 로맨스 장르에서 꽤 자주 나오는 도식인데, 캐릭터성과 연출이 모든 것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이런 장면들 앞에서 관객들이 서래와 해준을 사랑하지 않기는 매우매우 어렵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인물들이 언어의 장벽 앞에서 조심스럽게 서로를 탐색하고 살피고 다가가 결국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일말의 티끌도 없이 깨끗하기까지 하니, 그저 빠져들 수밖에.


평범한 관객 중 하나인 나는 서래가 보여주는 “망한 인생 살면서도 꺾이지 않는 인간” 특유의 끈질김에 매료되었고 서래를 사랑하게 된 순간 헤어짐을 택하는 해준의 올곧음에 사로잡혔다. 뭘 어떻게 해서든 서래를 지켜주고 싶은 해준, 그런 해준의 모습에 처음으로 안온함을 느끼며 어떻게 해서든 그를 쉬게 해 주고 싶은 서래. 삶에 지친 두 사람의 마음이 천천히 겹쳐지는 과정은 세심하고 감각적인 연출로 다가온다. 그렇게 사랑에 빠진 두 사람이 각자의 사랑을 각자의 방식으로(그러나 서로를 위해) 끝내는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영원해졌다.


이 부분에서 나의 오타쿠-하트가 이 영화는 네 인생작이라고 긴급 사이렌을 울렸다.


사랑 이야기 좋아한다면 추천, 망한 사랑 이야기 좋아한다면 더 추천, 망함으로써 영원해진 사랑 이야기 좋아한다면 내려가기 전에 꼭 봐야 할 작품이다.


정말……, 영화는 역시 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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