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는 영웅이 아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윤동주 [서평]

by 적필

그를 칭송하는 자는 더더욱. 그저 상대적으로 평온한 삶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나 행동하지 못하는 모순적인 인간임을 깨달은 한 고통받는 인간이다. 어찌 보면 그 당시 어떠한 무력 저항도 없이 시대에 순응한 자일뿐이다. 그때 자신의 목숨을 파리만치 여기지 아니하고 일제에 저항하다 기록이란 사치 한 점 남기지 못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무명의 독립투사가 얼마나 많은가.


그에 비하면 윤동주는 창씨개명 후 도쿄 릿쿄 대학에서 유학하며 안전한 곳에서 안전한 글을 감상에 젖어 쓰는 인간이 아니었던가. 응당, 인간으로서 합당한 일말의 가책을 느끼며 몇몇의 글에서 양심선언을 직접 표하지도 못하고 에둘러 내비쳤을 뿐이 아닌가.


물론, 윤동주가 시대 방관자의 태도로 안일한 글만 쓰며 편한 삶만 살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격동적인 폭압의 시대에 당대 지식인으로서 사상적 저항을 한 것은 높이 살만하다. 특히, 생의 끝자락에서 학생 민족주의 그룹 사건으로 연행된 것은 그가 끊임없이 윤리적 갈등을 무겁게 짊어지며 번민해 온 까닭일 터이다. 식민의 언어에 잠식되지 않고 한글을 사용하려는 의기 또한 존중받아 마땅하다.


허나, 이러한 모든 것들도 혈혈단신으로 당신의 목숨을 내건 얼굴 없는 혁명가들보다 윤동주가 더욱 조명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이름 없는 독립운동가들은 나몰라라 하고 윤동주란 이름만 과도하게 기려지는 것이 무언가 꺼림칙하고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다.


그럼 윤동주를 기리지 말라는 것인가? 아니다. 윤동주를 논하는 것이 아닌 역사를 곧이곧대로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스스로 자신의 양심과 가책을 알아봐 달라고 애걸복걸했겠는가? 뭐, 내심 인간으로서 그러한 마음이 조금은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수많은 작품들을 악착같이 남겨 놓은 것을 보면 말이다.


확실한 것은 그가 직접적으로 자신의 고뇌를 선전한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국수주의자니 한글 전용론자니 하는 말도 지껄이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윤동주가 아닌 녹색 종이에 눈이 충혈된 진드기만도 못한 거지발싸개 같은 자들에게 있다.


더 이상 윤동주에게 관심 있는 사람은 없다. 윤동주는 더 이상 시인이 아닌 하나의 꾸준히 잘 팔리는 상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윤동주를 대하는 태도다. 코모도왕도마뱀처럼 박테리아 가득한 침을 질질 흘려대는 것이다. 고통받는 한 인간의 마지막 양심으로 쌓아 올린 권위에 겸상하려는 졸렬한 수저를 들이미는 것이다.


이네들은 윤동주 시인의 정신을 온건히 옮기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척하며 정작 신경 쓰는 것이라곤 책 표지 디자인 선정과 양장본 만들기 따위다. 윤동주를 위해 쓰였다는 서문, 후기, 발문들은 어떠한가. 모두 똑같다. 위에 언급한 자들과 동류다. 윤동주가 자기혐오와 고백으로 후대에 이룩한 명예에 기생하는 기생충들이다. 하이에나 같은 간교한 자들이다.


추모글이며 발문이며 명칭만 제각기 다를 뿐 자신들의 현란한 글발을 자랑하기 위해 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윤동주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온 천지가 한자로 뒤덮인 글은 최소한 쓰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이란 것을 한다면 말이다. 주둥아리로는 그의 정신을 기리는 언어를 뱉어대나 정작 배출되는 것은 윤동주의 정신과 언어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겉멋 든 한자로 도배된 글뿐이다. 그런 글 따위 전혀 궁금하지가 않다.


여기에서 슬슬 딴지를 걸고 싶을 것이다. 내가 한글 전용론자라며 말이다. 한자 사용을 뭐라 하는 것이 아닌 당대 식민의 언어로 삼켜지고 있는 나라를 걱정하며 시를 쓸 때 최대한 한글을 쓰고자 한 지고의 정신을 기린다고 하는 자들의 모순을 꼬집는 것이다.


더불어 당대 언어의 지배가 예민한 시국에 윤동주는 한글을 최대한 사용함으로써 본인만의 방식으로 저항했다. 한자는 어쩔 수 없이 이전 역사와 문자 체계가 깊이 관여되어 있어 혼용을 인정하는 것이지 그 잔재를 씀으로써 우월감을 느끼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한자 혼용의 실용성, 구조적 관성이란 그럴싸한 말은 절대로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식민의 시대에서 가장 예민하게 언어 주권의식을 갖고 우리말의 자율성을 더 깊이 있게 감각했어야 했다고 본다. 윤동주는 그 감각을 확실히 예리하게 곤두세운 청년이다.


국가는 또 어떠한가. 혼란스러운 당대 시국 호도의 수단으로 이용한 윤동주를 더욱 감정적 상품으로 치켜세우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하지는 않았는가? 정치색이 회색인 윤동주가 국가에게 안전한 상품은 아니었는가?


나는 무언가 선각자처럼 꿰뚫는 시야를 가진 사람이란 이미지에 심취하여 음모론에 중독된 인간이 아니다. 애초에 그런 목적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희생된 자들을 찾는 어려운 길엔 눈과 귀를 닫고 쉬운 길을 경주마처럼 좇는 것이 꽤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그냥 꼴보기가 싫은 것이다.


머리말을 윤동주 시인이 의도한 시의 하나인 것처럼 그럴싸한 '서시'라는 제목으로 변장시키는 편집자들 하며, 어떤 책에선 18편의 시, 어떤 책에선 19편의 시 숫자도 들쑥날쑥, 현대어를 따른다며 그네들 입맛대로 원문을 변형해 놓는 편의를 가장한 왜곡이 다 웃긴 것이다. 재미있는 익살꾼들인 것이다. 꼴값인 것이다.


"이른바 '서시'의 처리 문제도 그렇습니다. 육필원고본에서는 이 글에 아무런 제목도 달지 않은 채 맨 앞머리에 놓는가 하면 행 가름도 그 뒤의 시작품과는 구별되게 하여, 독자로 하여금 이게 본문의 시들과는 엄연히 다른 성격의 글 즉 '머리말'임을 알아차리게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초간본'에서부터 변형을 가하기 시작해, '서시'라는 제목을 부여하는가 하면 아예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라는 부제까지 임의로 첨가해 놓습니다. 원본과는 다르게 편집자가 그렇게 했다는 설명을 붙여 놓지 않아, 독자들로서는 애초에 윤동주가 그랬던 것으로 오인할 수 있습니다."


"표기도 그렇습니다. '드려다 봅니다'를 '들여다 봅니다', '가엽서집니다'를 '가엾어집니다', '단풍닢'을 '단풍잎', '떠러진다'를 '떨어진다', '덥힌다'를 '덮인다', '밖구어'를 '바꾸어' 따위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모든 표기를 맞춤법에 맞게 한 것도 아닙니다. 바꾸려면 다 바꾸든지, 아니면 원형대로 했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초판본에 서문을 써준 정지용 시인도 '서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말인 걸 알았던 게지요. 그러나 제2판[증보재판]에 와서 둘레의 점선을 벗겨내 버림으로써, 독자들은 이를 〈자화상〉을 비롯한 다른 작품과 동등한 시작품으로 여겼던 것이지요."


"이런 자장에 힘입어, 윤동주 시인의 이른바 '서시'는 시집의 '序(서)' 즉 '머리말'이 본문의 시 작품보다 더 유명해진 결과를 낳았습니다. 물론 머리말로 출발한 시라도 명작이라면 얼마든지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작자의 의도도 중요하지만 독자의 반응도 의미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시인 윤동주 시인의 애초 편집 의도는 사실대로 밝혀야 하고, 그 뒤에 가해진 편집자의 의도는 의도대로 따로 알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와 같은 사실이 아직 연구자와 독자에게 충분하게 인식되지 않았다고 나는 판단합니다."


"학자에게는, 시인이 편집한 원형 그대로 독자가 읽게 해 줄 의무가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그래야만, 윤동주 시인과 시에 대한 이해와 연구가 더 바람직하게 이루어지리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 윤동주, 「엮은이의 말」, 『하늘과 바람과 별과詩』, 지식과 교양(20160407), 78-84쪽.


그래 아무렴 어떠한가. 다 좋다. 다 좋으나 나를 가장 화나게 하는 것은 '척'하는 것이다. 본질을 찾는 척, 윤동주의 음성을 온건하게 전달하고 싶은 척. 가증 떨지 말란 것이다. 책에 엮은이 표기조차 하지 않는 것은 뭐 말할 가치조차 없다. 윤동주란 인물에게 관심도 없는 것들이, 제 몸뚱이 하나 건사하기 바쁜, 제 살 아픈 것에만 관심 있는 것들이 어디 극을 펼치는가.


윤동주 전시집 양장본에서는 "윤동주는 평생 한글로만 시를 썼음"이라고 헛소리를 기똥차게 늘어놓는다. 한글의 정의를 모르는 것인가? 한글을 한국어로 혼동한 것인가? 육필원고 사진본에 버젓이 한자들이 넘실거리는데 저렇게 새빨간 거짓부렁을 뻔뻔스럽게 지껄인다.


"동인지가 일본어로 발행되기 때문. 윤동주는 평생 한글로만 시를 썼음." - 윤동주, 「윤동주 연보」, 『윤동주 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스타북스(220216), 241쪽.


이게 책을 내는 자들의 수준이다. 내가 사소한 걸로 트집 잡는 놈으로 보일 것이다. 내가 묻겠다. 이게 사소한가? 잘못된 정보를 무려 35쇄나 발행해 대는데 이게 사소한 것으로 힐난하는 것인가? 미화된 부정확한 정보를, 역사 왜곡을 가랑비에 옷 젖듯 3대 대형 온라인 책 판매 플랫폼에서 판매부수 상위에 랭크된 이 책에 적힌 이 정보가 사소한가? 이딴 태도로 책을 내고 본질인 척하는 꼬락서니가 매우 심드렁하다는 것이다.


해외 번역서도 이따위로 펼치진 않는다. 그러한 책들조차 정성을 기울이는데 이건 자국의 역사 아닌가? 아무리 돈돈 거리지만 가슴이 있다면 적어도 직업윤리라는 것은 새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바람인 것이다.


윤동주가 당대 여타 지식인들보다 한글의 중요성, 우리 언어의 중요성을 더 무겁게 받아들인 것은 맞다. 그의 시는 누구들과는 달리 거진 한글로 이루어져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육필원고본에 보면 그가 한글로 썼던 제목을 다시 한자로 수정한 시도 있으며 산문은 산문이 아니고 그냥 한문이란 장르인 것처럼 한문이 즐비하다. 한문을 쓴다는 것을 짚는 것이 아닌 윤동주가 무조건 한글만 고집한다는 과잉 선전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 또한 시인으로서 겉멋을 부린 시도 있고, 현학적인 한자와 어휘들로 너저분하게 늘어뜨린 시도 있다는 것이다. 한글만 지고지순하게 파고드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교과서나 가장 잘 팔리고 있는 그를 설명하는 책들에서 말들을 이상하게 써놓으니 자꾸 미화되고 영웅시되는 것 아닌가.


한글 '외딴 우물'에서 한자 '자화상(自画像)'으로 시 제목 변경한 사진 아래 인용 참고.

- 윤동주, 「제1부 사진판 윤동주 자필 시고」,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사진판』, 민음사(19990301), 107쪽.


정보전달과 검열, 퇴고의 수준이 이따위니 대가리에 초록 종이 굴러올 생각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잔존하고 있는 윤동주의 육필원고를 직접 촬영한 이 사진본이 아니었다면 더욱 심한 왜곡이 펼쳐졌을 것이다. 아니 소설 하나가 뚝딱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네들의 출중한 실력대로라면 말이다. 이 귀중한 사진본을 허락한 유가족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바다.


생전에는 양심의 가책으로 고통받는 한 청년이 편히 죽지도 못하고 외마디의 비명과 함께 순절했는데 죽어서까지도 괴롭히는 악한들이여. 진정 악마가 그대들이 아니라면 누구인가.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이여. 이제 그만 그를 놓아라. 밥상에 더러운 수저를 치워라.


마지막으로 윤동주의 서시 ― 사실은 제목이 없던 머리말일 수도 또는 시일 수도 나는 중립 그러나 제목이 없는 것은 사실인 ― 를 나도 참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시들은 대체로 끝에 날짜 표기를 한자식으로 표기해 놨는데 서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획의 한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난 그래서 이 글 또는 시를 참 좋아한다. 그러한 점이 가장 윤동주다운 글이 아닌가.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드는 것이다. 그 외에도 내가 인상 깊었던 시를 인용하고 양심의 고통하던 한 시인을 기리며 할 말이 아직도 참 많지만 함구하고 화를 누그러뜨리겠다. 이 서평의 끝맺음을 그의 시로 마무리하겠다.


가볍게 머리를 식히기 위해 시를 골랐는데 오히려 머리를 최대한으로 달구어버리게 만든 시집이라 칭하는 돈벌이에 급급한 활자들.


견을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람이

바삭바삭

추어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래미

달랑달랑

얼어요


이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건조한 겨울의 한랭을 단조롭고 순수한 아이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 와닿아서다. 무언가 따듯하다. 겨울을 표현하는데 온정이 도리어 느껴진다.


제목 없음(서시라고 불리는 글 또는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 11. 20.


외딴 우물(원제였다가 자화상 한자 自画像으로 윤동주가 직접 수정한 시)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어가선 가만히 드려다 봅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펄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

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저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사나이가 가엽서집

니다 도로가 드려다 보니 사나이는 그

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사나이가 미워저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사나이가 그리워집

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펄치고 파

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追億(추억)처

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이 시는 윤동주 시인이 내면 속 자기혐오와 동시에 자신을 가엾게 여기는 양가적 감정이 잘 묘사된 시인데 그 표현 방식이 꽤 흥미로워 각인이 된 시다.


서평에 참고한 책 4권


이복규 엮음, 『하늘과바람과별과詩』, 지식과교양(20160407)

운동주100년포럼, 『윤동주 전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스타북스(220216)

김동근 발행, 『하늘과바람과별과詩』, 소와다리(220305)

왕신영, 심원섭, 오오무라 마스오, 윤인석 엮음, 『윤동주 자필 시고전집 사진판』, 민음사(1999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