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그것이 파랑새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2013년 8월 20일,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다.
캡처해둔 것은 그 뒤로 4년이 지난 때였고, 지금은 그 뒤로 다시 3년이 더 지났다.
내가 직장인을 그만두고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자유를 즐기며 한창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의욕으로 불타오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난 왜 이런 글을 썼을까?
어느새 자유인으로 살기를 선택한 지 7년이 넘었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해 그림 그리는 작가도 되어보고, 회사도 차리고, 팀도 꾸려보고, 남에게 월급을 줘보고, 거의 말아먹기도 해 보고, 다시 겨우겨우 정신 차려서 일을 어찌어찌 꾸려나가 여하튼 지금까지 나름 잘 살아있다. 그렇고 보니, 나름 대견하다. 나. 하하하...
그 시간들을 지나오면서의 느낌은 뭐랄까... 사실 무언가 간절히 하고 싶어 했다거나 몰입했다는 충실한 느낌보다는 스스로 납득할만한 답을 찾아 헤매었던 기분이다. "내가 잘 살고 있는 걸까?"라는 단순한 질문에 대한 답을 말이다.
사실 애초부터 뭔가 하고 싶은 게 있어서 그 틀을 뛰쳐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때 자유인의 삶을 선택했던 가장 큰 이유는 직장인의 삶이 내게 맞지 않는 옷처럼 뭔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 답답한 느낌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커지지만 했었다.
그렇게 회사라는 틀을 뛰쳐나왔고,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답을 찾는 과정이 나를 계속 움직이게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돌고 돌아 요즘 다시 찾아낸 답은 결국, 저 문장이다. 마치 파랑새 이야기처럼.
결국 자기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생각해보면 저 답은 내가 나만의 파랑새를 찾겠다며 나름의 안정된 생활을 박차고 나와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아니 그전에 이미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는 그것이 파랑새라는 확신이 없었을 뿐이다.
겨우 돌고 돌아 찾은 답이 똑같다니 누군가는 헛고생이 아니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파랑새를 찾아 헤매고 다닌 그간의 시간들이 없었다면 지금 내 손안에 있는 새가 "파랑새"라는 것은 절대 알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파랑새의 비극은 그것이 생각보다 흔하다는 데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파랑새를 잡았음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또 다른 파랑새를 찾아 떠난다. 그렇게 자기 상상 속에만 있는 완벽한 파랑새를 찾아 헤맨다.
파랑새의 진실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하나의 새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서로 달라 보이는 모든 새들이 모두 "파랑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이 찾은 파랑새와 내가 찾은 파랑새는 단지 모양이 다를 뿐, 같은 파랑새라는 거다.
음...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언듯 보기엔 같은 파랑새로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같은 파랑새는 아니라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세상에는 수천수만의 여우가 있고 장미가 있지만, 어린 왕자와 만난 여우와 장미는 세상에서 오직 단 하나뿐이다.'라고 일찍이 생떽쥐베리가 "어린 왕자"에서 밝혀 놓은 바와 같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파랑새의 진실은,
우리 각자가 가진 파랑새는 모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파랑새라는 거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파랑새가 더 멋져 보인다고 그걸 버리고 다른 파랑새를 찾아 헤매지 마라.
그 대신, 당신의 그 파랑새를 다른 이들이 부러워할 만큼 멋지게 키워라.
어쩌면 그게 파랑새 이야기에 숨겨진 또 다른 진실일 수도 있다.
:
2017년 8월 29일 오전, 첫 글을 쓰다.
2020년 7월 9일 저녁, 글을 고쳐쓰다.
2021년 7월 8일 밤, 글을 고쳐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