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누군가의 발끝에서 조용히 시작된다.
바삭거리는 은행잎 위에
가만히 앉아 있는 소녀처럼,
말없이 스며든다.
하늘은 더 깊어지고
햇살은 부드럽게 나를 감싸고
어디선가 바람은 오래된 기억을 끌어다 놓는다.
그리운 것들은 늘 가을을 타고 온다.
조금은 멍하니,
조금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나는 오늘 가을과 마주 앉는다.
한옥 담장 사이로
햇살이 반짝이는 이 골목에서—
가을은 소리 없이 말을 건다.
괜찮냐고,
잘 지내냐고,
이제는 좀 멈춰도 된다고.
그래서 나는
이 계절을 좋아한다.
떠밀지 않고, 조용히 곁에 있어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