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처했던 상황과 환경, 그 세월을 다 이해한다고 해도 그와 나 사이에서 용납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는데, 바로 신뢰다. 그는 말수가 적을 뿐더러, 말주변까지 없는 사람이었다. 어떤 말을 꺼내기 위해서는 한참을 생각해야 했기에 그가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자주 사용하던 방법은 거짓말이었다.
그는 두 가지를 간과했던 것 같다. 첫째, 본인은 거짓말에 서툴다는 것, 둘째,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게 된다는 것. 그리고 하나를 더 덧붙이자면 나는 꽤 집요한 면이 있는 사람이다. 내 장점이지만, 크나큰 단점이기도 하다. 어떤 사건이나 문제가 일어났을 때 A에서 B로 가는 인과관계가 명확해야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다. 그 과정과 끝에 있는 진실이 설령 나를 아프게 하더라도 나는 그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 인과관계가 이해될 때까지 대화하려는 (상대방에게는 취조로 느껴질지도 모르겠지만) 못된 습관이 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할 때, 그는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나름대로 잘 짜여진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나에겐 집요함과 더불어 ‘좋은 촉’이라는 무기가 있었다. 난 그 무기를 들고, 그에게 묻고 또 묻고를 반복했다. 그는 대답하고 대답하다가 결국 지쳐 자백하곤 했는데, 나는 그 지점에 닿는 매순간마다 그에 대한 신뢰를 잃어갔다.
나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던 것만큼이나 누군가를 믿는 것도 어려웠던 걸까. “내 남편은 그런 사람 아냐! 내 남편 말이 다 맞아! 절대 그럴 리 없어!” 하며 마인드 컨트롤도 해보고,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잘되질 않았다. 그를 너무 믿어주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됐다. 무조건적인 믿음을 한 번 더 가져보려 발버둥쳤지만,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그의 관한 정보들이 너무 망가져 있었다. 우리는 이로 인한 싸움이 잦았다. “나는 너를 믿을 수가 없다고.”라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그의 가방에서, 그의 외투 주머니에서, 그의 차 안에서 담배를 발견할 때마다 그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우겼지만 결론적으로 모두 그의 것이었다. 심지어 그가 조금 일찍 출근하던 날, 대담하게도 집 앞에서 담배를 펴다 새벽예배를 다녀오던 엄마한테 발각되었을 때도 그는 자신이 물고 있던 그 담배가 자신의 것이 아니라 했다.
신뢰의 문제는 비단 담배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다음에는’, ‘한 번만’을 입버릇처럼 달고 살았고, 나는 그때마다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하지만 같은 문제는 여러 번 반복됐고, 그때마다 그는 “다음에는 잘해볼게. 한 번만 더 믿어줘.”로 문제를 일단락 지으려고 했다. 차라리 못할 것 같으면 “나 도저히 그건 못하겠어.”라고 인정하고 함께 다른 해결방안을 찾는 게 낫지 않았을까. 나는 항상 그 ‘다음’을 기대했고, 변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지쳐갔지만 그는 자신의 노력을 몰라주는 내게 화가 난다고 했다.
사실 그는 ‘인정’하는 것에 두려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졌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일 거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순간, ‘졌다’는 생각은 자존감을 떨어뜨려 그 사람의 삶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인정’이란 ‘졌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확인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일 뿐인데... ‘그래. 맞아. 그건 그렇구나.’ 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텐데... 어차피 그렇게 인정하지 않은 채, 이기지도 못 할 것을 이기고자 오기를 부려봤자 팩트 폭행 당하는 건 그였다. 사실 나로선 그가 억울해 할 건더기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본래 성격대로 좋게 좋게 생각해서 끝없이 좋고, 가볍게 생각해서 끝없이 가볍고, 안정된 생각으로 끝까지 안정된 관계로 나아갔다면 우리 관계에 이런 어려움은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모두 내 중심적이고, 독단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 나에게도 큰 문제가 있었을지 모른다. 나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말자’를 마음에 새기고 살았기에 내가 하지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도 않았다. 헌데, 이것은 내 신념일 뿐 남한테 강요할 수 없음에도 나는 입으로 말하지만 않았지, 그에게 온 마음을 다해서 소리쳐 요구해왔다. 네가 한 말은 지키라고.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고, 나는 점점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를 믿지 못하는 내 잘못인지, 도저히 더이상은 믿지 못하게 만든 그의 잘못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게 나는 남편에 대한 신앙심을 잃어버렸다.
돌아보면 그는 이러한 내 고민과 고통에 전혀 공감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니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내게서 다시 신뢰를 회복하고, 나아질 거란 확신을 주기 위한 노력의 방향이 내가 보는 방향과 달랐다. 그가 노력하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도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문제를 바라보는 그의 결과 나의 결이, 진심과 진심이 달랐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닿지 못했다.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그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 있을까?’ 하고 불현듯 생각해본 적이 있다. 여전히 마음이 어렵고, 쓰리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내 마음은 그리고 내 대답은 바뀌지 않을 거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나도. 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