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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언니 Dec 01. 2023

삶은 개구리 증후군 (2)


 그가 술을 마셨을 때, 분노 게이지 상승 버튼을 수시로 누른 사람은 나였다. 그 버튼을 누르지 않는 방법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외면하거나, 피하거나, 받아들이거나. 하지만 내 못되고 예민한 성정은 그 버튼을 눌러야만 직성이 풀렸다. 그의 잘못된 음주 습관을 고치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알려주고는 싶었다. ‘넌 내게 또다시 같은 문제로 잘못했으니까 용서를 구해야 해.’라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었다.


 처음엔 그도 ‘이 정도는 괜찮아. 내가 잘못했잖아.’라며 나의 이런 부분을 포용해주고 이해해줬지만 점점 힘에 부쳤을 거다. 사람은 정도를 지키기 마련이라는데, 나는 그 정도를 모르고 술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계속 더, 더, 더 기고만장해졌다. 그러니 그도 술을 마셨을 때만이라도 술기운을 빌어 나에게 어떤 모양으로든 도전장을 내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걸 취중진담이라고 했어야 하나.






 다시 집들이 날로 돌아와서, 친구와 함께 사라진 그를 찾은 곳은 동네 노래방이었다. 술을 마시면 종종 정신을 잃고, 연락이 안 되던 남편의 술버릇 때문에 남편 몰래 설치해 둔 위치추적 어플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술 문제로 곤욕을 치르다가 남편 핸드폰에 위치추적 어플을 설치할 땐 살다 살다 내가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싶었는데... 그를 데리러 갈까도 생각했지만 노래방에 전화를 걸어보니 영업시간이 끝나 간다고 하여 어쨌든 집으로 돌아올 것 같아 거실에 앉아 기다렸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아랫배가 저릿했다. 엄지손가락에 붙여둔 밴드에는 이미 꽤 피가 스며들었다. 불안하면 검지와 중지 손가락으로 엄지손톱을 뜯는 버릇 때문에 나의 엄지손가락은 엉망이었다. 사실 내 마음이 훨씬 더 엉망이었지만... 


 30분쯤 지났을까, 친구와 남편이 신난 듯이 흥얼거리며 현관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랫집에 우리 친정 부모님이 살고 계신다는 것과 지금은 새벽 3시 30분이라는 것을 아주 새까맣게 잊고 있는 듯했다. 2층으로 우당탕탕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문이 열렸다. “어! 왜 안 자고 있었어?” 하며 나를 향해 걸어오는 그에게서 술 냄새가 심하게 났다. 같이 들어온 친구는 나를 보더니 내 눈치를 살폈다. ‘그래. 너라도 눈치가 있어서 다행이다.’ 눈치를 살피던 친구는 갑자기 졸리다며 작은 방에 가서 자도 되겠냐고 물었고, 나는 그러라 했다. 


 거실에 대자로 뻗어 있는 친구1, 머쓱하게 작은 방으로 들어간 친구2, 거실 바닥에 널브러진 온갖 술병들과 안주들 그리고 취한 그와 그를 노려보는 나, 새벽 3시 30분. 모든 것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조용히 그를 안방으로 데려와 방문을 닫았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고, 그는 화장대 의자에 앉았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그는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는 듯 눈을 껌뻑껌뻑하며 졸고 있는데 어이가 없었다. “뭐 해.” 정신을 차리라며 한마디 던지자, 그가 휴대폰을 꺼내려는 듯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뺐는데 휴대폰과 함께 무언가 툭 하고 떨어졌다. 전자담배였다. 




“이건 뭐야?” 

“전자담배. 근데 내 거 아니야.”

“네 것이 아닌데 왜 네 주머니에서 나와.” 

“몰라. 내가 어떻게 알아.”

“지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아씨, 그만 좀 해.”

“뭘 그만해?”




 그의 말대로 그날은 그만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도 이미 분노하고 있었고, 피해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혀버렸다. 


1. 나는 임신 7주차 임산부다.
2. 몸이 힘들어도 집들이에 온 사람들이 먹고 마시는 동안 최대한 친절히 응대했다.
3. 말없이 사라진 술 취한 남편을 새벽까지 기다렸다.
4. 한껏 흥에 취해 귀가한 남편은 끊겠다고 약속한 담배를 소지하고 있고, 심지어 자기 것이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다.
5. 누가 봐도 난 억울한 피해자다. 


 생각이 이렇게 흐르자, 지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술에 취할 대로 취한 그를 몰아붙였다. “담배 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어? 한 아이의 아빠가 될 사람인데 왜 아직도 담배를 피우고 있어? 차라리 피웠으면 피웠다고 하지 왜 거짓말을 해? 비겁하고 옹졸해.” 내가 할 수 있는 비난이란 비난은 그 자리에서 모두 퍼부었다. 그러자 그는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쥐고 있던 전자담배를 그대로 벽에 내리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전자담배는 그대로 산산이 부서졌고, 그의 주먹에는 상처가 났다. 마음이 부서진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하염없이 울었다. 그렇게 우리집 벽엔 멍이 들었다.






 이혼 후 그가 없는 집의 가구들 위치를 바꾸면서 벽의 멍자국을 가려보려 애써보았지만 하필이면 붙박이장의 문이 여닫히는 바로 앞이라 다른 가구를 놓을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우리는 이 집에 사는 동안은 그 멍자국을 계속 마주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 자국을 볼 때마다 ‘삶 속에서 누굴 만나고, 누구와 살아가든 아무리 화가 나고 억울하더라도 한 박자 숨 쉬고 이야기하자’는 다짐을 한다. 시간이 지나면 벽의 멍자국도, 내 마음의 멍자국도 조금씩 옅어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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