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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언니 Dec 08. 2023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면 (2)


 동네 병원에서 퇴원한 동시에 진료를 보러 간 1차 대형병원은 늘 그렇듯 의사선생님을 만나는 일도, 검사일정을 잡는 일도 쉽지 않았다. 동네 병원에서 찍은 MRI로는 정확한 병명 판독이 어렵다는 이유로 한 달 뒤에 새로 MRI를 찍기로 하고, 의사선생님을 만나는 일정까지 잡고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기다리는 한 달 사이에 갑작스레 팔, 다리에 힘이 빠지거나 머릿속으로는 정상적으로 말을 하고 있는데 입 밖으로는 마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어눌한 말이 튀어나오는 증상이 발생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끼고 쓰러지기도 했다. 그렇게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러 진료일이 되었고, 그 한 달 동안 평생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너무 많이 겪은 터라 잔뜩 긴장한 채로 병원을 찾았다. 이번에도 역시나 엄마가 동행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남편은 업무가 바빠 출근해야 했기 때문이지만, 내가 쓰러졌다 말했을 때도, 말이 어눌할 때도, 팔, 다리에 힘이 빠져 걱정할 때도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에 병원에 함께 오고 싶지 않았다.



 진료실로 들어서자 젊은 여자 교수님이 앉아 계셨다. 대형병원에서 교수님들에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기에, 내가 말할 내용을 적은 메모지를 쥔 채로 자리에 앉자마자 쓰러졌던 일, 말이 어눌해진 일 등을 말씀 드렸다. 이야기를 듣고는 교수님이 자리를 고쳐 앉으셨다. 보통은 자신의 모니터에 뜨는 환자의 차트나 진료 이력만 보는데, 자세를 고쳐 앉는다는 건 둘 중 하나다. 환자가 심각한 상태이거나, 치료가 더이상 필요 없거나. 나의 경우는 안타깝게도 전자였다. 차트를 살펴본 교수님이 설명하셨다.



 “환자의 뇌혈관 모양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데,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는 여러 검사를 통해서 알 수 있기 때문에 입원이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현재 확실한 건 혈액의 흐름이 좋지 않다는 것이고, 젊으니까 그래도 이만큼 살아있는 겁니다. 그런데 근래에 무슨 이유에서인지 뇌경색이 너무 많이 왔다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검사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젊은 사람이기에 어르신들처럼 마비 혹은 사망으로 이어지지 않고 평상시처럼 지내는 것이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진료일 전에도 언어장애, 낙상사고가 있었고 응급한 상황으로 보이기에 치료를 위해 응급입원을 해서 현재 보이는 뇌경색의 원인을 빠르게 찾아야 해요.”



 나는 진료를 보러 갔다가 그 길로 응급실로 입원하게 되었다. 코로나가 한창인 시기여서 입원 보호자는 응급실에 있을 수 없었고, 게다가 엄마는 공주도 돌봐야 했다.


 응급실에서 간단한 소변검사와 피검사부터 뇌척수액 검사, MRI, 뇌혈관 조영술, DNA 유전자 검사까지 잠도 자지 못하고 꼬박 17시간을 검사만 받았다. 드디어 검사가 다 끝났나 싶었는데 뇌졸중 집중치료 병동으로 가야 한다며 이송된 곳은 6인이 함께 쓰는 병실이었고, 나 외에는 모두 60~70대 어르신 환자들이었다. 내가 알고 있던 뇌졸중은 그런 병이었다. 젊은 사람보다는 어르신들에게 흔한 질병. 갑자기 사망에 이르는 무서운 질병. 집중치료실은 병실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조차 모두 간호사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곳이었다.

집중치료실에 배정받으면 낙상고위험군 환자로 분류되어 노란색 팔찌를 따로 받게 된다.



 응급실에서 나의 담당교수님이 변경되었는데, 변경된 담당교수님이 말씀해주신 내 진단명은 일단 상세불명 일과성 뇌허혈 발작으로, 쉽게 말해 뇌경색의 전조증상이라고 했다. 뇌척수액 검사에서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는데, 그 말인 즉슨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뇌혈관 일부를 막았기에 뇌경색 증세가 근래에 더 보인 것 같다는 것이다. 이전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내 뇌혈관은 일반 사람들과는 다르게 산발적으로 퍼져 있는 모습이어서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혈관을 막은 것이 더 치명적이었고, 혈류가 원활하지 않기에 평생 관리와 약물 복용이 필요해 보인다고 하셨다. 아직은 대상포진 바이러스가 뇌척수액에서 검출되고 있으니 집중치료실에서 좀 더 지켜보자는 말과 함께.





 나의 몸 상태 외에도 문제는 또 있었다. 집중치료실은 병실 밖으로 환자가 나갈 수가 없어서 반드시 보호자가 상주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엄마가 계셨으면 했지만 엄마는 공주와 집 살림을 모두 챙겨야 하기에 결국 남편이 휴가를 쓰고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다. 내가 응급실에서 집중치료실로 옮겨진다는 연락이 엄마한테 간 뒤 가족들이 모여 이 비상사태를 어떻게 해결할지 논의했고, 그 결과 남편이 휴가를 쓰고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결정되었을 때, 남편의 첫마디는 “그 정도로 아프대요?”였다고 한다. 

낙상 고위험군 환자이기 때문에 환자, 보호자는 반드시 낙상 안전 교육을 받는다.


 짐을 가지고 병실로 올라오는 남편의 표정이 좋지 않아 눈치가 보였다. 진료를 보러 왔다가 갑자기 입원하는 통에 내 짐이 많아서였을까. 아니면 보호자 노릇을 해야 하는 게 싫어서였을까. 내가 누운 침대 아래서 남편은 보호자 간이침대를 빼서 눕더니 휴대폰 게임을 시작했다. “괜찮아?”라는 말 따위는 없었다. 사실 그때도 사이가 그리 좋던 시기는 아니어서 그러려니 했지만 아프니까 더 서럽긴 하더라.


 아파서 입맛이 도통 없는 데다가 신경이 예민해져 병원 밥이 더욱 거칠고 입에 맞지 않게 느껴졌다. 그런 내 마음을 알았는지 엄마는 이것저것 반찬을 해서 보내줬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탓에  내가 먹는 둥 마는 둥 몇 숟갈 뜨고 내려놓으면 남편은 제 몫으로 데운 햇반과 함께 내가 남긴 밥까지 싹싹 맛있게도 다 비웠다. 병원에선 딱히 할 것이 없기에 그는 보통 잠을 자거나, 휴대폰으로 영상을 보거나, 게임을 했다. 우리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난 목이 마르면 조용히 텀블러를 내밀었고, 그도 아무 말 없이 물을 떠다주곤 했다. 


 어느 날, 그가 떠다 준 물을 마시려는데 텀블러에서 물비린내가 나기에 “컵 안에서 냄새나는데 좀 씻어서 떠다 줘.” 했더니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곤 컵을 들고 일어섰다. 그런데 간이주방이 아니라 병실 안에 있는 세면대로 가더니 컵을 씻는 게 아닌가. 금방 돌아온 그에게 “간이주방은 저기 돌아서 나가야 있어. 세제도 거기 가야 있을 텐데?”라고 얘기했더니, “세면대에도 세정제 있잖아.”라고 대답했다. 세면대 위에 있는 세정제라고는 병원에서 쓰는 손 세정제뿐인데... “손 세정제로 닦았어?”라고 재차 묻자 “손 세정제도 다 떨어졌더라.”라는 짧은 답변이 돌아왔다. 손 세정제도 다 떨어졌다면 그럼 도대체 내 텀블러는 무엇으로 닦았을까 싶어 텀블러 냄새를 맡아봤다. 익숙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간호사 선생님이 매 시간마다 내 혈압을 재러 오실 때, 내 수액을 바꿔주러 오실 때마다 바르던 손 소독제 냄새. 분노와 할 말들이 가슴에 차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면 싸움이 될 것이기에 말을 삼켰다. ‘그래. 여기가 내가 대접받는 위치구나’ 싶었다.






 참 억울하지만 우습게도 남편은 자기 자신은 잘 챙기는 사람이다. 약품관련 일을 하기 때문에 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어서 증상별로 먹어야 하는 약의 종류를 꿰고 있었다. 그는 봄, 가을, 겨울이 되면 곧잘 감기에 걸리곤 했는데 감기의 초기 증상이 보일 때마다 꼬박꼬박 약을 잘 챙겨먹었다. 내가 부탁한 것들은 잘도 까먹곤 했는데, 본인 약을 챙기는 건 까먹는 법이 없었다. 


 그는 나나 공주가 감기에 걸리면 은근슬쩍 다른 방에 가서 잤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없었다. 본인이 감기에 걸리면 내가 다른 방에 가서 자면 안 되겠냐는 말을 하지 않는 이상 안방을 고집했다.

 


 고마운 기억보다 서럽고 못난 기억이 오래 간다 했던가. 어느 시점이 지난 후로는 우리의 관계가 사실상 남보다도 못했기에, 결혼할 때 검은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서로 사랑하고 보살피기로 약속했던 우리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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