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죄인이다.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죄들을 많이 지었지만, 이혼을 마음에 품은 순간부터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것 같은 죄책감에 빠져들었다. 그 죄책감은 하나님을 시작으로 공주를 향하여, 나를 금이야 옥이야 길러주신 나의 부모님을 향하여, 같이 살 수 없을 만큼 미워하게 되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을 향하여, 그의 부모님을 향하여 혹은 그 모두를 향해 있었다. 평생 다른 누군가도 아닌 남편을 죽일 듯이 미워하며 살 수 없어 이혼을 택했다는 것이 죄스러웠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을 해칠 것만 같아, 살고 싶어 이혼을 결심했다지만 마음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홀가분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문득 예전에 우울증 진단을 받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에게 목놓아 호소했던 일이 생각났다. 그 길로 교회를 찾았고, 매일같이 시간이 날 때마다 교회에 갔다. 점심시간엔 회사 근처 교회에라도 가서 바닥에 납작 엎드려 울기만 했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혼은 분명히 죄이기에 내가 하나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것은 내 마음의 고통을 온전히 아시는 분, 위로해주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엎드려 울 때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은 죄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결혼생활 동안 남편에게 지은 죄는 물론이거니와, 그 이전의 죄, 내가 얼마나 나쁘고 못된 인간이었는지가 내 마음을 쥐고 흔들었다. 나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내 발목을 잡았고, 그럴 때마다 더 목놓아 울었다.
“하나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고, 내 기도의 전부였다. 여전히 하나님은 묵묵부답이셨으나, 그럼에도 이를 악 물고 하나님께 매달리기로 했다.
나의 죄책감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혼에 동의하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경제권은 정리하겠다.”는 그와의 동거는 지속되었다. 내 속은 타들어 가는데 그는 매우 평온해 보였고, 나에게 문자로 통보된 ‘경제권 정리’에 대한 이야기 이후엔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생존에 관련된 대화조차도 말이다. 보통 “밥 먹었어?”같은 생존에 관련한 대화를 제외하고 하루 대화시간이 15분 이하면 정서적 이혼 상태라고 하는데, 이미 우리는 그 단계를 뛰어넘은 지 한참이었다. 그럼에도 그와의 불편한 동거는 계속되어야 했다. 그는 동거를 유지해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들었는데, 첫 번째로 본인이 ‘이혼을 할지 말지 결정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갈 곳이 없다’였다. 물론 그는 나중에 이혼이 결정되고 나서도 집에서 퇴거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대상포진으로 시작되어 뇌혈관에 자리잡은 바이러스는 내게 ‘뇌경색’이라는 병을 남겼고, 언제 또다시 쓰러질지 모르는 딸이 안쓰러웠던 엄마는 고작 백만 원이라는 돈을 받고 우리 부부의 일하는 시간 동안 손녀의 양육과 다섯 식구의 살림을 모두 도맡아 하셨다. 가정도우미를 쓴다면 제값도 치르지 못할 금액이다. 나는 대상포진과 뇌경색이 찾아온 이후엔 종종 팔다리에 힘이 빠졌고, 기운을 차리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직장에서 온 에너지를 쏟아내야만 다른 생각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었기에, 늘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됐다.
처음엔 엄마에게 공주의 어린이집 등원과 하원 이후부터 나의 퇴근 시간까지만 봐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나의 병치레 때문이긴 했으나 엄마가 대신해주는 살림의 달콤함을 맛보고 나니 엄마에게 살림은 해주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퇴근 후 저녁과 주말에는 늘 아래층에서 엄마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을 먹었다. 그렇게 두 집안, 다섯 식구의 빨래도 오롯이 환갑이 넘은 엄마 몫이 되어버렸다.
이혼 이야기가 오고 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에게도 이미 내 이혼 결심에 대해 알렸고, 이혼을 하고자 하는 이유들에 대해서도 말했기에 엄마의 시선에선 나의 남편이 곱게 보였을 리 없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늘상 하던 대로 퇴근 후 저녁과 주말 매 끼니마다 빠지지 않고 내려와 함께 식사를 했다. 그와 함께 앉은 식탁에서 나는 어김없이 체했다. 나는 점점 식사자리를 피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딸을 아프게 하고도 혼자 내려와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하는 사위에게 장모는 냉담해졌다.
10월 어느 주말 아침, 나는 일찍부터 회사에 출근할 일이 있어서 집을 비웠고, 하필이면 그때 일이 벌어졌다. 그날 저녁, 엄마에게 전해들은 전말은 이렇다.
어김없이 1층에서 주말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던 친정엄마에게 홀로 일어난 공주가 다가왔다고 한다. 2층인 우리집에서 혼자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온 것이다. 5살짜리 꼬마에게 쉽다면 쉬운 일일 수 있겠지만, 공주는 그때까지 한 번도 혼자 그리 해본 적이 없었다. 분명 내가 출근하면서 확인할 때까지만 해도 공주는 곤히 자고 있었고, 침대 밑에는 그가 자고 있었다. 공주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띠며 “할머니, 나 혼자 일어나서 내려왔어. 잘했지?” 했고, 엄마는 “아빤 뭐하고?”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물어보나마나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고 있을 것이 분명하여 따로 묻지 않았단다. 아침을 차리는 할머니 옆에서 조잘조잘 떠들던 공주가 갑자기 “할머니, 할머니는 아빠가 싫어?” 물었고, 엄마는 한참을 생각하다 이렇게 말했다.
“공주야, 만약에 다른 사람이 공주가 좋아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거나, 아프게 하면 마음이 어떨 거 같아?”
“음... 싫지! 속상할 것 같아.”
“할머니도 마찬가지야. 엄마가 많이 아파. 엄마가 몸도 아픈데 마음은 더 아프대. 그런데 그 아픈 게 네 아빠 때문이래. 그래서 할머니가 너무 속상해. 사실 네 아빠 얼굴도 안 보고 싶어. 후... 공주야, 얘기 그만하고 밥 다 됐으니까 이제 할아버지 깨워. 식사하시라고.”
그러곤 엄마가 뒤돌아 다시 식사준비를 하는데, 공주가 할아버지 방으로 가지 않고 가만히 엄마를 쳐다보다가 이내 결심한 듯 조용히, “아빠는?” 하고 묻더란다. 엄마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자, 공주는 이런 말을 남기고 할아버지를 깨우러 갔다고 한다.
“그래도 밥은 줘야지.”
엄마는 그 자리에서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했다. 5살짜리 아이도 다른 사람을, 가족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마음으로 배려하며 살아야 하는지 알고 있는데, 그 애비라는 사람이 자기 자식만도 못한 것이 너무 화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단다. 그럼에도 밉고 싫어도 아직은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이니 공주의 말처럼 그래도 밥은 줘야겠다는 생각에, 공주에게 자고 있을 아빠를 불러오라고 했고 공주는 한걸음에 아빠를 깨우러 갔다.
그렇게 공주와 함께 내려온 그는 평소처럼 안녕히 주무셨냐는 말 한마디 없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곤, 감사하단 말 한마디 없이 다시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 사위가 꼴도 보기 싫어졌지만 엄마는 ‘네 딸, 내 손녀 때문에 참는다’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버틴다고 하셨다.
그날 퇴근하고 엄마와 밤 산책을 하며 이 이야기를 쭉 듣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첫 번째는 딸이 이혼 선언을 했음에도, 여전히 사위의 밥을 차려주게 만들고, 사위의 냄새나는 빨래도 다 해서 말리고 개키게까지 만든 나 자신에 대한 원망의 눈물이었다. 두 번째는 부모의 상황에 대해 특별히 말해주진 않았지만, 모든 상황을 분위기와 추측으로 조금씩 알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 나름대로 견뎌내고 있을 공주를 향한 미안함의 눈물이었다. 더불어 이렇게 헌신 중이면서도 자신이 부족하여, 그리고 자신이 이혼녀이기 때문에 딸인 나도 이혼녀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마음을 졸이고 있는 엄마에게 너무 죄송스러워 눈물이 났다.
이 불편한 동거는 상당 기간 지속되었고, 그동안에 엄마와 나는 몸무게가 5kg 넘게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