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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레언니 Dec 26. 2023

막장 드라마

“이번 검사 결과에서 모야모야 혈관이 뚜렷이 보이네요.”


 지금까지 뇌경색에 대한 추적검사를 몇 개월마다 받아 왔었고, 매년 초엔 뇌혈관 조영술을 해 왔기에 별일 아니길 바랐으나 결과는 청천벽력이었다. 분명 이전 진료에서는 모야모야병 유전자가 없고, 모야모야 혈관도 그리 뚜렷하지 않다고 했었는데...


 내 인생에만 쉴 틈도 없이 폭풍이 몰아치는 기분이었다. 기나긴 터널을 지나 2주 전에야 협의이혼 신청서를 법원에 제출했는데, 오늘은 모야모야 병 진단을 받았다. 그 순간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서 눈물이 쏟아졌다. 평소와 별다를 게 없을 거라는 생각에 혼자 병원에 갔기에 모야모야병에 대해 설명해주시는 교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했는데, 흘러내리는 눈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참을 모니터 속의 내 뇌혈관 사진을 보며 설명을 이어가던 교수님이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시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휴지를 건네셨다. 그리곤 모야모야병에 대한 설명을 차분히 이어가셨다.


 모야모야병은 뇌에 혈액을 공급하는 경동맥 및 주요 혈관이 좁아지거나 막히면서, 주변에 아지랑이처럼 수많은 가늘고 약한 이상 혈관이 발생하는 희귀질환이다. 미세혈관 모양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와 비슷하다고 해서 ‘모야모야’(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을 표현한 일본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모야모야병이 발병하는 원인은 유전성 요인이 많다고 알려져 있으나,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발병률이 10만 명 기준 연간 0.35~0.5명인 모야모야병은 서양보다는 동아시아 지역인 일본, 한국에서 더 많이 발병되는 질병이며, 보통은 여성에게 더 많은 발병률을 보인다. 특히 유전질환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가족력이 있을 경우 10~15%로 발생률이 높아지기 때문이고, 이는 일반인보다 30~40배 높은 확률이라고 한다. 

정상 뇌혈관과 모야모야병의 혈관, 뇌 전체적으로 혈액공급이 잘 되지 않는다.



 모야모야병의 주요 증상은 일과성 허혈 발작 또는 뇌졸중이며, 증상 악화 요인으로는 울기, 심하게 운동하기, 뜨거운 음식 먹기, 숨이 차는 상황, 임신 등이 있다. 대부분의 모야모야병 환자들은 만성두통을 호소하고, 일시적인 마비, 감각이상, 언어장애, 어지러움 등의 증상이나 급성 뇌경색과 같은 증상을 보이기도 하기에 반드시 치료해야 한다고 하셨다. 모야모야병은 내과 및 약물적 치료는 사실상 불가능하고 증상 완화를 위해 항경련제를 사용하거나 뇌출혈 예방을 위한 고혈압약을 사용할 수 있고, 뇌경색 재발 방지를 목적으로 항혈소판제 사용이 가능하지만 모야모야병의 진행을 예방할 수는 없기에, 유일한 치료법은 ‘외과적 치료’라고 하셨다. 그렇다. 여기서 ‘외과적 치료’란 수술을 의미한다.

두피혈관(측두동맥)과 뇌표면혈관(중대뇌동맥)을 연결하는 수술, 개두수술을 진행해야한다.


 나는 모야모야병의 유전자가 없음에도 발병한, 좀 특이한 케이스라고 했다. 나의 왼쪽 뇌혈관은 이미 대상포진 바이러스 때문에 중요 혈관 하나가 막혔지만, 그나마 젊기에 다른 혈관들이 애써주고 있어서 뇌경색 증상들이 많이 나타나진 않았단다. 근래에는 스트레스로 인해 팔다리에 힘이 빠져 주저앉거나, 물건을 놓치는 증상들이 자주 나타났기 때문에 빠른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라 하셨다. 증상이 나타나는 곳은 오른쪽 팔다리여서 왼쪽 뇌수술을 먼저 해야겠지만, 뇌 사진으로 보았을 땐 모야모야 혈관은 오른쪽 뇌가 더 심한 것으로 보이므로 당장은 왼쪽 뇌수술부터 하고 경과를 살핀 뒤에 오른쪽 뇌수술을 하는 것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는 말을 덧붙이셨다. 

보통 성인에게 진행하는 직접문합술



 설명을 모두 듣고 나니, 뇌혈관 수술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과 나는 이제 희귀질환 환자라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저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것이지, 상황이 납득되거나 마음이 괜찮은 것은 전혀 아니었다. 











 이혼과 희귀병 진단으로 한 해를 시작한 것도 모자랐는지 시련은 한 차례 더 찾아왔다. 나는 모야모야병을 진단받아 두 차례의 수술을 받게 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직장에 알렸다. 수술 날짜가 확실히 정해진 것도 아니었지만, 한 해의 업무분장이 시작되기 전에 미리 배려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린 것이 오히려 내게 독이 되었다. 수술하지 않은 내 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며,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사람과 함께 일하기 어렵다는 것이 리더들의 입장이었다. 나는 그저 수술하는 그 달에만 병가를 쓸 계획이었는데, 1년 휴직을 권고받았다. 한쪽 뇌를 수술하고 난 뒤 반대쪽을 수술할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과 나의 회복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것이 이유였다. 


 내가 발붙이고 서 있는 여기가 현실인지 꿈인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마치 모든 막장을 모아놓은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것 같은 지금,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뼈가 시릴 정도로 꽂혀댔다. 내가 직장에서 받는 월급도 없이, 이혼 후 남편이 주는 양육비로는 내 병치레를 하며 공주와 살아가기 어려웠다. 여러 걱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내 감정을 헤집어 놓았다. 신파는 싫었는데...



 직장 상사와의 면담이 끝난 뒤, 결국 휴직하기로 결정하고는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았다. 서러움이 다 터져나와 엉엉 울고 싶었지만, 모야모야병 환자에게는 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모야모야병 환자들은 뇌혈관이 좁아지면서 뇌로 산소공급이 되지 않아 일시적으로 뇌 기능에 문제가 생기는 일과성 허혈발작이 잘 일어난다. 주로 울거나 감정이 격해졌을 때 호흡이 가빠지면서 뇌혈관의 폐색이 심해질 수 있는 것이다. 보통은 수분 정도 지속되다가 회복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증상이 호전되지 않고 한 시간 이상 지속되면 뇌졸중이 발생할 수 있다. 뇌졸중이 발생할 경우 잘 알려진 것처럼 발작이 일어나거나 편마비 증상이 올 수 있기 때문에 감정이 격해져 우는 것은 피해야 한다. 고로 나는 이를 악 물고 정신을 차려야 했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로 인해 뇌경색 증상이 꽤 보이던 때였다.



 인생이 폐허였다. 이혼을 했고, 희귀질환을 얻었다. 한 해에 두 번의 뇌수술을 해야 했고, 그 수술은 모두 개두수술이다. 수술이라곤 공주를 낳을 때 제왕절개한 것 외에는 해 본 적이 없는데, 머리를 열어 뇌혈관을 수술한다니 겁부터 났다. 게다가 직장까지 잃다니...



 그 와중에도 남편에게는 굳이 알리고 싶지 않아 모야모야병 발병과 휴직에 대해서는 끝내 비밀로 했다. 남편은 이혼신청서를 법원에 접수한 후 집을 떠나는 날까지도 친정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잘도 먹었지만, 여전히 “잘 먹었습니다.”와 “감사합니다.” 같은 인사치레는 하지 않았다. 그는 본인의 짐을 챙겨 집을 완전히 떠나는 날조차 1층에서 놀던 공주를 불러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는 그대로 우리 가족에게서 남이 되었다. 공주와 함께 있던 우리 부모님께 “안녕히 계세요.”라는 말도 남기지 않은 채 홀연히 떠났다.




 다섯 식구, 6년간의 동거는 그토록 허무하게 종결됐다. 좋은 이별은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 부모님에게까지 그리 차가워야 했을까 싶다. ‘하긴, 무슨 좋은 마음이 있어 인사하고 싶겠냐’ 하는 생각이 들어 그저 실소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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